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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싼 가격에 비행기를 구한 거라, 경유도 장거리로 해야 했어. 갈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여덟 시간, 올 때 서른한 시간이었는데 그런 건 별로 문제 되지 않았어. 그냥 간다는 게 중요했으니까. 처음 도착한 샌프란시스코는 좀 흐렸어. 상상하던 활기와 총천연색의 아름다움보단 이제 뭐 하지? 가 더 컸고. 뒤져보니까 물개를 봤다는 사람도 있고 바다를 봤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거기까지 가기엔 거리가 있어서 가볍게 도시를 둘러보자, 결정했지. 하지만 나에겐 거대한 캐리어와 배낭이 있었고・・・그걸 끌고 "가볍게"는 될 수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40달러를 내고 맡겼지. 너무 충격적이라 아직도 가격이 기억나네. 지금 다시 간다면 굳이 밖으로 안 나갔을 수도 있는데, 모르잖아. 처음이고. 게다가 여덟 시간 동안 처박혀 있기엔 그 시간이 더 아깝다고 생각돼서 한 거지.
한결 홀가분해진 채 나온 바깥은 신기했어. 신기하단 말밖에 어울리는 게 없었어. 사막 한가운데 영화에서 흔히 보던 구부러진 도로가 세워져 있고, 좀좀따리 보이는 도시 전경과 영어로 뒤덮인 시야는 새삼, 진짜 미국에 왔구나, 느끼게 해 줬어.
정말 이국에 왔구나. 열세 시간의 시차를 건너서.
밀브레 역에 내렸는데 사실, 내 감격과 다르게 할 일도 하고 싶던 것도 없어서 잠깐 고민했던 것 같아. 그렇게 도시 한가운데 구경해도 괜찮았을 거야. 단풍이 막 물들기 시작한 초가을이라서, 서늘하면서도 고운 색으로 물든 정경이 좋았거든. 그치만 나는 한 곳에 도통 오래 못 있는 사람이고・・・어디든 걸어가 보자, 했지. 사족인데 나는 걷는 걸 좋아해. 여행 가면 아침부터 밤까지 내리 걷는 스타일이야. 이거 때문에 친구랑 원래 부산 가려다가 취소했어. 스타일이 너무 반대라는 걸 깨닫고・・・가면 냉전 치르겠다 싶어서(ㅎ).
그 유명한 케이블 카를 보면서 나는 걸었지. 정말 생각 없다는 걸 증명해 주는 게, 나는 사람들이 그걸 타는 이유가 관광 목적이라고 생각했어. 오르막길이 높으면 얼마나 높겠냐, 했는데・・・진짜 높더라. 체력이 안 좋은 편도 아닌데 반쯤 올라가다 멈췄어. 옆에선 하하호호 까르륵 깔깔 웃으면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탄 케이블 카가 매끄럽게 올라가고, 나는 퀭한 얼굴로 그거 쳐다보고・・・그래도 뭐, 덕분에 조금 더 세세히 볼 순 있었지. 그리고 그 서부 사람 특유의 활기와 쾌활함도 직접 겪을 수 있었고. 언덕 다 올라가서 사거리에서 신호 기다리는데, 교통 안내원 분이 갑자기 말 걸더라? 어디서 왔어? 샌프란은 처음이야? 말 걸어오는 걸 생깔 정도로 사회성 말아먹은 건 아니니까 얼레벌레 대답했지. 한국에서 왔어, 처음이야, 어쩌고. 현대랑 삼성 어쩌고 얘기도 했는데 기억이 잘 안 나. 그냥, 야 진짜 여기 사람들 신기하다・・・정도의 강렬함만 남았지. 스트레스받은 채로 도망치듯 온 거니까 사실 누구랑 대화할 마음이 없었거든. 영어가 유창한 것도 아니고, 유랑하듯 걷고 싶었던 거였으니까. 근데 또 그렇게 무게라곤 1g도 찾아볼 수 없는, 바람 한 토막 정도에 불과한 대화는 괜찮더라고. 생판 모르고, 이대로 헤어지면 끝인 사람과 가볍게 하는 건 내가 뭔가 신경 쓰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걸까, 싶었어. 그냥 말 그대로 인사말이었으니까. 네 여행길이 안녕하길 바라는.
샌프란에서 좋은 시간 보내라며, 밝게 인사하는 분을 등진 채 쭉쭉 올라갔어. 올라가고 내려가고, 오른쪽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갔다가, 진짜 정처 없이 헤맸지. 바다가 보였거든. 처음엔 낮고 높은 건물이 들쑥날쑥 이어지다가, 어디로 가니까 낮은 건물이 쭉 이어지고, 장사를 하려고 연 건지 습관처럼 연 건지 모를 스산한 분위기의 슈퍼를 지나다 보니까 바다 끄트머리가 희미하게 보이는 거야. 나는 바다를 사랑하니까・・・길도 제대로 모르면서 보이는 곳을 향해 무작정 걸었지. 여긴 버스도 없어. 중심가가 아니라 그런지 사람도 별로 없고 휑했어. 지도도 안 보고 냅다 걷는데, 물론 도착은 못했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보이는 거랑 직접 가는 건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잖아. 시간이 도저히 안 맞겠더라고. 그래서 다시 도심 쪽으로 틀어서 이리저리 쏘다니는데 희한하게 바다에 닿았다? 내가 본 해변 있는 곳은 아니고, 선착장이었지만. 그래도 바다는 바다잖아. 공원이라기엔 조깅 코스에 더 가까운, 바다 쪽으로 불룩 솟아난 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바다를 좋아하지만 한국에선 바다에 자주 가보지 않았어. 가긴 갔는데 보통 혼자 가진 않고 사람들이랑 가니까, 이때처럼 마냥 하늘과 물살을 보며 감격에 젖긴 좀 힘들었지. 감격보단 여운에 젖었다는 게 맞겠다. 흰 구름 밑에 파란 물결은 보기만 해도 벅차오르게 만드는 게 있으니까.
지금 돌이켜보니 내 미국행의 처음은 바다였구나, 싶어. 처음 기억이 바다라니 정말 아름다운 시작이었구나, 싶기도 하고. 물론 그 뒤에 역으로 가는 길목엔, 텐트 친 노숙자, 바닥에 그냥 누워있는 노숙자, 팻말을 꽂아두고 앉듯이 누운 노숙자 등 안타까운 모습들만 목격했지만・・・처음이 정말 좋았어. 그 바다도 같이 보여줄게. (참고로 보정을 쨍하게 해 버린 사진만 남아서-원본 대다수가 사라짐-내가 느낀 기분 그대로는 못 느끼겠지만, 그래도.)
보니까 다시 가고 싶네. 마침 이맘때였거든, 떠난 게. 가을이라 그런지 더 싱숭생숭한 걸 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잘 견뎌볼게. 아름다움을 돌이켜 적다 보면 다시 여행하는 기분을 낼 수 있을 테니까. 남은 연휴도 바다와 함께, 가을과 함께 흐르듯 가볍게 잘 보내길 바라며. 다음엔 길고 긴 뉴욕의 시간과 함께 돌아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