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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는 퀸스에 머물렀고, 며칠은 샬럿과 워싱턴에, 한 주는 브루클린에 머물렀는데, 옮길 때마다 참 재밌고 힘들었어. 힘든 거야 물리적인 일이니 어쩔 수 없었고, 재밌는 건 동네가 다르니까 그 각각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던 거지. 거기는 단편적인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올라. 아시안으로 북적거리는 지하철과 버스, 일 달러에 두 개 하던 사과, 줄창 한국 노래를 틀어제끼던 한국식 카페와 할로윈 맞이 장식을 성대하고 장황하게 꾸며놓은 집들. 무지개를 창에 그려놓은 스타벅스와 볕 좋은 공원을 빙글빙글 돌며 산책하는 사람들. 거대한 빨래 더미를 카트에 실은 채 천천히 걷던 사람과 우아하게 정돈된 정원 같은 카페에서 말차 라떼를 마시며 노트북을 쳐다보던 사람, 재채기하니까 '갓 블레스 유!'를 가뿐하게 말했던 할아버지, 스산한 가을밤과 새파란 하늘, 초록과 노랑이 어우러졌던 나날들. 수제 치즈와 햄, 거대한 케이크와 빵, 온갖 종류의 호박.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맵시 있고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당연하게 흘러가는 일상 장면을 포착하는 게 정말 즐겁고 재밌었어. 누군가의 일상이 누군가에겐 너무나 새로울 수 있구나, 느끼기도 했고.
아, 포트폴리오 만들고 사진 편집한다고 노트북 가져갔거든? 퀸스와 맨하튼과 브루클린에서 거대한 받침대와 노트북을 이고 거리를 헤매던 게 엊그제 같다. 놀랍게도 뉴욕은 카페에서 노트북 작업할 만한 곳이 정말, 별로, 거의 없어. 정확히 말하면 맨하탄 같은데...나는 1) 2층이고, 2) 화장실이 있으며, 3) 콘센트가 있을 것...이라는 필터링을 돌려서 찾았는데(물론 별도 조건으로 커피값이 안 비쌀 것, 이 붙었긴 했지) 딱 하나 찾았어. 많은 스타벅스가 2층이 아니거나, 자리가 비좁고 화장실이 대체 어디 매달렸는지 모르겠으며, 콘센트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말 이야기하거나 커피만 호로록 마시고 갈 공간들이더라. 거기도 변압기 때문에 무릎으로 충전기를 받친 채 작업을 했고...감히 화장실 갈 생각을 안 하긴 했어. 두 시간인가 세 시간 동안 앉아있는데 힘들어서 때려쳤지. 그다음부터 맨하튼 갈 땐 메신저 백 하나만 달랑 메고 가난한 유학생처럼 떠돌았어. 너무 자유로운 고학생처럼 보였는지 몰라도, 나한테 길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어. 그래도 차가운 도시라 카페들도 차가울 것 같았는데, 자본주의와 서비스 정신이 탑재되어서 그런지 되게 활달하고 친근하게 말 많이 붙여줬어. 어떤 개인 카페는 커피만 시키니까 우리 크로와상이랑 같이 주는 프로모션 해, 이걸로 먹어, 하고 추천도 해주고, 어쩌면 그냥 환하게 웃어주는 자체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 같기도 하다. 안녕, 잘 지냈어? 뭘 마시고 싶어? 같은 거. 샌프란에서 들은 것처럼 가볍고 영양가 없는 말들 말이야. 구태여 의도와 목적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어쩌면 그런 말들에 목말랐던 것 같아. 생각 안하고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말들에.
퀸스에서도 작업했는데, 거기 스타벅스는 더더욱 작업할 공간이 아닌 데다 숙소랑 멀어서(도대체 왜 숙소에서 안 하냐고 할 수 있는데, 숙소에서도 했어. 밤에. 다만 나의 로망 중 하나인 뉴욕 카페에서 작업하기...를 실천하고 싶었을 뿐이야) 맥도날드에서 했거든? 거긴 한인타운 쪽이라 한국 사람들이 많았는데, 내가 노트북 켜고 뚱땅거리고 있으니까 한 어르신이 다가오더라고. 아이패드를 들고. 어떻게 켜야 하냐고, 배터리도 다 충전했는데 전원이 안 들어온다고 해서 해드렸는데 되게 좋아하시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라고. 하긴, 맥도날드에서 뭔가 하는 (학생인지 뭔지도 모를) 사람은 신기하겠지...여행 얘기로 한참 떠들었었네. 미국이라는 특수성일까, 미국 한인타운이라는 특수성일까? 후자겠지? 제3국에서 만나는 제삼자는 관계라는 걸 쌓지 않아도 되는 특수한 사람이니까.
카페들은 다 좋았어. 작업만 안 하면. 책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사람을 만나거나 커피를 마시는 목적만 있다면 어디든 따뜻했거든. 여기도 다 언뜻 조각보처럼 얽혀서 떠올라. 풀숲과 꽃이 우거진 카페에서 마신 펌킨 라떼. 야외 테라스에서 찬바람 맞으며 마셨지. 책 읽으려고 불쑥 들어갔던 던킨도넛과 유명하다고 해서 들어갔던 카페의 테이크아웃 핫 아메리카노. 바로 옆 공원에서 자잘하게 쏟아지는 분수 물줄기와 함께 책 읽었지. 크로와상과 커피가 세트니까 이걸로 먹어요, 해줬던 친절한 맨하튼 크로와상 카페도, 전시 보러 가기 전 배고파서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던 패스츄리 빵과 카페라떼도...또 사족이지만, 로파이 뮤직 들으면서, 앨범 들춰보면서 쓰니까 더 괜히 잔잔해지는 거 같아. 이때 이랬지, 하면서.
그러고 보니 그 라티노 타운에 머물 때 스타벅스에 들렀거든. 25주년 기념으로 커피 사면 리유저블 컵을 준다는 정보 하나만 믿고 갔는데...음, 지점마다 다르다는 것만 알았어. 있긴 있는데, 내가 생각한 게 아니라 그냥 크리스마스처럼 종이컵이 변경된 거였고, 자본주의 나라답게 25주년 기념 리유저블 컵 세트를 팔더라. 물론 저는 나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세트를 샀습니다. 이걸 심지어...사혼의 조각처럼 나눠서 선물했어. 그것도 엄청 고심해서 나눠줬지......내가 갔을 땐 환율이 장난 아니게 높았고, 넉넉하게 돈 싸 들고 간 게 아니라서 정말 어마어마한 짠내 투어였다는 걸 알려줄게. 얼마나 짰냐...자의로 간 식당이 없었던 것 같아. 누가 사주거나, 같이 가자고 해서 갔던 기억뿐. 1달러 50센트짜리 피자 한 조각 사서 길거리에서 와구와구 씹어먹은 기억도 덩달아 떠오르는구나. 추운데, 그나마 옆에 나처럼 피자 들고 우적우적 먹는 사람 있어서 내적 위로 받은 기억도......
여행 계획 세울 때부터 식사 비중을 엄청 낮게 잡긴 했어. 나는 미술관과 공원 위주로 돌아보고 싶었거든. 이렇게 말하니까 정말 가난한 유학생 같네. 그치만 후회하지 않아. 진짜 좋았어. 학창 시절에 미술 선생님이, 되면 꼭 실제로 봐야 한다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깨달았거든. 다음 편지에는 오갔던 미술관과 박물관에 대해 얘기해줄게. 이 편도 길어질 것 같다. 그래도 한 달 넘게 간 여행인데 에피소드가 짧아도 이상하지 않겠어?
게다가 여행기가 늘어지는 건 별로라서, 매주 발송할 거거든! (11월부터) 그러니 가볍고 가뿐하게, 즐겁고 편안하게 읽어주면 좋겠다. 오늘의 가을이 너에게 또 안녕하고 다정하길 바라며, 나는 바다를 보고 올게. 평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길 바라.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