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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잘 지냈니? 가을이라는 계절은 너에게 어떤 느낌과 감상을 가져다주고 있어? 나는 텅 빈 마음이라는 느낌에 자꾸 젖는 바람에, 그렇지 않다고 싸우는 중이야. 계절성 우울을 많이 타는 사람이라 이 홀가분함과 가벼움이, 사람을 또 도망치고 싶게 만들고 비어있다 착각하게 하네. 그래도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해줘. 토요일에 본 영화에서도 또 말해주셨어. "당신은 우리 사랑과 사명의 중심에 있죠." 빈 마음이라고 생각하지 마. 내겐 아무것도 없다고, 이 공허와 허무가 끝까지 내 멱살을 붙잡고 간다고 결론짓지 마. 헨리 나우웬이 그랬어. 언제나 당신은 사랑받는 사람이고, 기쁨이란 사실을 잊지 말라고. 사실을, 지우지 말라고. 이건 내게 하는 말이자 너에게 건네는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 계절에 먹히지 말자. 알았지? 그거 아니야. 절대.
오늘은 미술관에 대해 나누기로 했지? 난 전시, 특히 회화 보는 걸 좋아해.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빛: 영국 테이트 미술관 특별전⟫인데 빛에 대해 그림과 설치미술로 다양하게 표현한 게 좋았어. 여름과 숲을 강렬한 색채로 그려낸 전시도 있었는데 까먹었네. 한 시간 기다려서 들어갔는데 아깝지 않았어. 아무튼, 직업도 그렇거니와 미술 좋아하니까 뉴욕 가면 가야 하는 꼭 미술관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지. 숙소비 빼면 전시 보는 비용으로 다 나가지 않았을까 싶어. 모마, 리만머핀, 휘트니, 구겐하임과 메트로폴리탄, 노이에 갤러리까지 어지간한 데는 다 갔어. 디아 비컨도 가려고 했는데 왜 못 갔는지는 까먹었어. 뭐 돈이 없었거나 다른 데 둘러보느라 정신 팔렸거나 둘 중 하나겠지.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하면, 사실 제각각 고유한 특징이 있어서 비교하긴 어려워. 지금 막 떠오르는 건 모마긴 해. 그다음 노이에 갤러리. 모마는...전시장 첫 구역 천장이 엄청 높거든? 높고 넓은 공간을, 거대하고 굵은 타이포그라피와 원으로 가득 채워놨어. 보자마자 소름이 돋더라. 큰 걸 보면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잖아. 바다나 폭포나, 아니면 어마어마하게 넓은 숲. 그런 느낌이었어. 초록과 검정, 하양으로만 이루어진 글자들이 사방을 꽉 메꿨는데 그게 나한테 퍽 덮쳐오는 기분이었지. 그다음은 그 유명한 모네의 수련이 있는 곳에 들렀는데, 사람이 북적거려도 감동이 오는 거 알지. 그 틈새로, 전체로 다가오는 꽃과 물의 아름다움이란. 사람들이 제법 많이 앉아서 보고 있었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어. 계속 보고 있고 싶어지더라. 사진으론 다 담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더 눈으로 깊숙이 담고 싶어서 그랬나 봐. 잭슨 폴록이 그린 "One: Number 31"도, 바넷 뉴먼이 그린 "숭고한 영웅"도 다 그런 종류였어. 저번 편지에서 실제로 꼭 봐야 한단 말을 들었다고 했잖아. 무슨 소린지, 그 추상화들 보니까 확실히 알겠더라고. 광막해. 광활하고. 그리고 아주 많은 아름다움을 봤어. 클림트의 희망,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베이컨의 그림Painting도. 저마다 화풍이 다른 거 알지. 신기하게 그 모든 게, 순수하게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더라.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고...거기서도 몇 시간을 머물렀는지 모르겠어. 근데 원래도 한 1-2시간은 기본적으로 머무는데 널찍한 곳들은 정말 4시간은 작품 보는 데 썼던 것 같다. 아, 모마는 그리고 바깥 정원도 좋았어. 나가면 낮은 단으로 이루어진 바닥과 네모난 연못 두 개가 길게 이어져 있거든? 사람들이 그 앞 철제 의자에 앉아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가을볕을 맞으며 늘어져 있는데 그게 또 참 보기 좋더라고. 나도 잠깐 앉아서 작게 솟아오르는 물줄기를 바라봤어. 여행자의 나날은 그게 묘미지. 시간을 오롯이 보고 듣는 데 쓸 수 있다는 거. 혼자라면 더더욱 자유롭게 그럴 수 있고. 정경을 보고 햇볕을 쬐고, 찬 공기를 쐬며 듣는 자잘한 소리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어. 아마 이미 보고 싶던 그림과 예상치 못한 그림들을 봐서 흔연했던 거 같기도 해.
두 번째는 노이에 갤러리. 여긴 사진 촬영이 금지된 곳이야. 몰랐는데 먼저 뉴욕에 갔다 온 D가 여기 좋은 곳이라고, 여행 유튜버가 갔다가 매일 가고 싶은 곳이라 말할 정도라 해서 가봤지. 왜 그랬는지 조금 알겠더라. 클림트 그림이 잔뜩 있었는데, 한 사진에 꽂혀서 다른데 다 둘러보고도 계속 그 앞으로 돌아갔어. "portrait of ria munk, 3" 이건데, 찬란하다고 해야 할까...봄과 여름의 생동을 다 흩뿌린 느낌? 미완성작인데도 그 화사함이 주는 매력에 이끌려서 기꺼이 서너 번을 다시 봤어. 또 다른 층에서는 고전 영화인 <카사블랑카> 포스터며 영화 한 장면이 세트장처럼 꾸며진 작은 방과 무슨 영화제 포스터를 쭉 붙여둔 복도가 있었어. 거긴 촬영이 안 되니까, 내가 또 직업병(ㅎ) 도져서 아이패드에 막 레이아웃 스케치를 하고 있었는데 가드 한 명이 패드 얼마냐고 물어본 기억이 나. 말해주니까 너무 비싸다, 어쩌고 해서 나는 일이 일이다 보니까 필요해서 쓰는 데 좋아, 뭐 이랬던 거 같아. 엄청 열심히 스케치했거든? 근데 지금 찾아보니까 또 안 보이네. 분명 굿노트에 그렸던 거 같은데...찾으면 나오겠지. 그거 말고도 <park at kammer castle>, <pale face>, <portrait of gertha loew> 가 좋아서 메모해 뒀어. 쓰면서 다시 구글링했는데 디지털로 봐도 참 매력적이다 싶어. 대체로 자연물 아니면 쓸쓸한 인상을 주는 그림에 매료되는데, 클림트는 사람도 자연처럼 반짝반짝하게 그리니까 좋아지더라. 그렇게 생각해보면 나는 그냥 별처럼 빛나는 걸 좋아하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래서 갔던 곳이 또 휘트니 미술관이야. 이 사람의 생애는 영 별로인데, 그림은 너무 좋아해서 갔지. 에드워드 호퍼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었거든. 근데 들어가려다가 어떤 사람이 종이 줘서 봤는데, 시위하고 계시더라. 지금 여기가 사람을 얼마나 부려 먹는지 구구절절 써 있는데 씁쓸했어. 이후에 또 맨하튼 남부에 있는 거대한 스타벅스 갔다가 거기도 직원들이 시위하고 있어서 안 들어갔거든. 그런 걸 보면 어디든 노동이라는 건 고됨을 전제로 겪어나가는 행위인가 싶기도 하고...생각에 젖어서 들어갔는데, 또 사람이 참 칠렐레팔렐레야. 창밖으로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가 보이고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이 주르륵 걸려있으니까 바로 까먹게 되더라. 아직도 그 시위 종이가 집에 있는데도. 유명한 사진보단 작가가 뉴욕에 머물며 그린 그림들(전시 이름 자체가 에드워드 호퍼, 뉴욕이었으니까)이 걸려 있는데 좋았어. 이런 것도 다 그렸구나, 그리고 그 안에서도 묻어나는 애수라고 할까, 외로우면서도 담담한 느낌이 전해져서...새삼 정말 너무 좋았다. 딴소리지만 그래서 타블로 노래를 좋아했어. "Airbag" 이 떠오르는 그림들이었어. 아니면 "낙화". 음악 취향은 또 다른 편지에서 적어보기로 할게. 소란 속 정적. 군중 속 고독.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정적이 좋아. 근데 귀국하고 얼마 안 있어서 서울에서도 열렸던 걸로 알아. 봄인가 여름에 했던 거 같은데 괜히 반가워했었거든. 이 특별 전시 말고도 거대한 조형물에서 느껴지는 시각적인 즐거움도 좋았어. 확실히 그림보다 동적이니까 사람이 조금 경쾌해지더라고. 3층엔 통창으로 벽을 뚫어놓고 바깥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둔 구역이 있는데, 날이 맑고 깨끗해서 풍경 보는 즐거움도 분명 있었지.
미술관은 좋았던 순간들이 연이어 있었던 공간이라, 하나하나 다 말이 참 길다. 구겐하임이랑 메트로폴리탄은 다음 편지에 이어 쓰도록 할게. 리만머핀도. 리만은 사실 되게 작은데...실제 공간의 규모랑 관계없이 내가 느낀 즐거움은 또 널찍했으니까.
11월에는 이제 매주 보기로 했으니까, 안녕도 더 자주 전할 수 있겠다. 좋아.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가을이 전하는 황량함에 지지 말고, 몸과 마음을 언제나 잘 챙겨주며 살아가도록 해. 다음 주에 보자.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