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Place New (5)
D가 D에게 #12 Some Place New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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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네가 겪고 있는 불안함, 불편함, 불확실한 느낌이
결코 나쁜 게 아니야. 오히려 그 감정이 너의 성장점이 되어줄 거야.
『언어가 삶이 될 때』, 김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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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좋은 아침이지? 좋은 아침이고 낮이면 좋겠어. 너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언제나 네 기쁨과 평안을 바라는 마음으로 띄우는 거니까. 좋지 않았다면, 좋지 않았다는 감정의 목덜미를 얼른 놔주도록 하자. 매몰되지 않길 바라. 오늘의 이야기가 또 너에게 소소한 기쁨이 되길 바라며 이어 써볼게.
시간순으로 따지자면 메트로폴리탄이 처음이야. 간다니까 거긴 아주 넓어서, 목적을 정하고 가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지. 다 둘러볼 수가 없대. 나는 고전보단 근대나 현대 미술을 좋아해서(고흐나 고갱 같은 사람은 근대겠지? 난 역사에 취약해) 그 사람들을 둘러봐야겠다 결정했어. 그렇지만 한 번에 둘러볼 수 없다는 말대로, 거기까지 가는 것만도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 난 목표를 정했다고 앞만 보고 돌진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매번 주위를 구경하고 관찰하면서 걷거든. 물론 이것도 그럴 때가 있고 저럴 때가 있어. 최근에 너무 앞만 보고 가다가 누가 날 불렀는데 못 알아먹고 가다가 3초 후에야 알아차리고 인사한 경험도 있지...아무튼.
가는데 중세 유물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었어.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답게 끼워진 아치형 창문, 청색 금색 박을 입힌 도자기 조각과 보석함, 섬세하게 오목새김 한 동전과 정교하기 짝이 없는 조각상들...그 하나하나에 눈을 못 떼겠더라. 다 너무 아름다웠어. 어떻게 이렇게 세밀하게 칠하고 붙였을까? 미술품이나 유물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지어졌던 집 내부도 고스란히 재현했는데(재현일까, 유물처럼 가져다 둔 걸까?) 거기도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한참 서성였어. 공간 하나가 아니라 침실, 응접실, 거실, 종류별로 있었거든. 아, 너무 많았어! 마음 같아선 일주일 동안 차근차근 둘러보고 싶을 정도였어. 찍었던 사진을 보며 쓰는데, 새삼 새록새록 그날이 떠올라서 아련해지고 있어. 하루 종일 둘러볼 체력이 안 됐던 것도 기억나. 여기서만 네 시간을 머물렀는데, 아침에 머스타드 뿌린 핫도그 하나 먹고 돌아다니니까 도저히 더 못 있겠더라. 머리가 아팠어. 이 예술품이 좋은 것과 별개로 너무 많은 시각 자극이 들어오니까, 소화할 체력과 정신력이 안 되더라고. 백여 장은 찍은 것 같은데...거울 나타날 때마다 기념으로 나를 남겼는데, 핸드폰에 다 가려서 얼굴이 보이지도 않아. 그렇지만 난 나를 남기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거기 잠깐 머물렀다, 는 정도만 있으면 충분해서 크게 신경 쓰이진 않는구나. 아무튼 그 유물들 보다간 원래 목적을 상실할 게 뻔해서 유혹을 뿌리치고 가려던 곳으로 향했지(넓어서 길 좀 많이 헤매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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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한 와인빛 벽에 그림들이 걸려있는데, 모르던 그림도 알던 그림도 마냥 새로웠어. 모르는 건 몰라서, 아는 건 실물을 봐서. 가까이 가면 그 덧칠한 자국이 보이는 거 알지. 몇 번을 칠했을지 모를 물감의 균열과 두께가 잘 보이거든. 그 한 번 한 번의 터치가 가까이서 보면 뭐 하나...싶은데, 멀리서 보면 다 어우러져 멋진 그림이 된다는 게 참 신기하지. 삶도 그렇겠구나 생각해. 점이 이어져서 선이 되고 면이 되어서, 마침내 아름다운 형상을 그려내겠지. 중간 과정이 그렇다고 볼품없다는 것도 아니야. 그땐 그 나름의 멋과 맵시가 있을 테니까. 참, 여기는 그리고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어. 학생이겠지? 아예 캔버스를 가져다 두고 그리는데 신기하더라. 이렇게 어마어마한 규모의 미술관인데 그런 자유를 허용했다는 것도 인상 깊었고. 말 그대로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회랑에서 꿋꿋이 난 내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한다, 는 자세도 멋지다 싶었지.
거대한 오벨리스크와 피라미드(통째로 뜯어온 건데, 내가 여기서 그 유적이랑 이집트 유물 보면서 하하 훔친 게 참 많네요~돌려줄 생각은 절대 없겠죠~? 하고 영상 찍어놨더라. 좋은 거랑 별개로 잘못한 건 잘못한 거야)를 마지막으로 보고, 사선으로 기울어진 한 면이 다 창가로 만들어진 광장에 앉아 쉬다가 돌아갔어. 아쉬워서 발이 안 떨어지긴 했어. 언제 또 올지 모르니까. 그렇지만 모든 건 알 수 없는 법이지.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그해 봄에는, 초여름에는 몰랐으니까.
10월 말에는 구겐하임에 갔어. 이땐 알렉스 카츠 전시가 열리고 있었지. 사실 근데 이 사람이 누구고 그림 보기 전에, 빙빙 돌아가는 소용돌이 모양 미술관을 실제로 본다는 게 조금 더 두근거렸어. 1층에서 5층까지 빙글빙글 굽이진 전경을 훑어보는데 혼자 또 감탄했잖아. 와, 신기하다. 뉴욕에서 정말 많은 걸 신기해하고 감탄했던 것 같아. 영화와 드라마가 보여주지 않은 세세하고 소소한 부분을 살펴볼 수 있었으니까. 진짜 살아 숨 쉬는 도시와 사람을 볼 수 있어서, 모든 걸 어린애처럼 놀라워하며 구경했었지...그 아이스크림콘 모양 같기도 한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듣도보도 못한 화가 전시가 열리고 있던 거야. 거기에 내가 간 거고. 물론 상설 전시도 운영하고 있어서, 피카소나 마네처럼 유명한 작가 그림도 관람할 수 있었어.
여기도 모마처럼 1층에 걸린 큰 그림 두 점이 가슴을 깊숙이 찌르고 갔어. 은빛으로 보이기도 하는 청회색과 가을 은행을 닮은 노란 그림...그 큰 그림이 매달려 있는데, 정말 이상하게 가만히 보게 되더라고. 객관적으로 말하면 마구잡이로 칠해진 선과 면인데. 그냥 나는 그때, 뭔지 모를 오묘함을 느꼈던 것 같아. 청회색 그림에선 새의 날개와 웅성거리는 군중을, 노랑에선 빛으로 가득 찬 기차 플랫폼을 보기도 했고, 그냥 무수한 일렁임을 느끼기도 하고...굳이 명확하게 형상할 필요 없는 이미지가 차례로 떠오르고 가라앉았으니까. 꼭 말이나 글로 남기지 않아도 되는,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앉은, 꿈결 같은 추상 말이야. 어쩌면 그림을 보고 나도 나름의 추상화를 그렸던 걸지도 모르겠어. 마음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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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는 그림, 엥? 스러운 그림과 유명한 그림들을 보다 보면 마지막 층에 도달하게 돼. 두 시간인가 세 시간 있었는데도 또 아쉬운 거야. 그래서 내려오면서 차근차근, 와닿았던 그림을 또 느리게 감상하고 훑으며 갔지. 어떻게 사람들은 저마다의 심상을 표현할 수 있을까? 늘 신기해. 신기한 게 너무 많아서 여행을 자꾸 가고 싶고, 가게 되고, 그리워하게 돼. 내려와서는 나처럼 그림을 둘러보고 지켜보는 사람들을 올려다봤어. 그 자체도 좋았거든. 뭐라고 할까, 그 자체도 하나의 예술처럼 느껴졌어. 영화 한 장면처럼. 둥글게 휘어진 곡선도 잘 감상하고 나온 곳이었다.
근데 다 신기하게 굿즈는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기념 연필들만 사 온 거 알아? 그나마 휘트니에서 우비를 샀는데......집에 잘 보관 중. 여태껏 두 번인가 세 번 입었네. 심지어 모마는 기념품관이 따로 있어서 다른 날에 찾아갔는데 구경만 실컷 하고 갔어.
리만머핀은 기념품도 없어! 아주 작거든. 2층 규모인데, 그마저도 전시는 1층에만 있었던 것 같아. 2층엔 예술 관련 잡지, 그러니까 여기서 발행하는 잡지만 진열됐던 기억이 나. 여기는 트위터에서 보고 간 데야. 자수라고 해야 하나, 바느질로 문고리며 콘센트를 만들었어. 알록달록한 색실로. 처음엔 아크릴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실이더라고(!) 너무 놀라서 뚫어져라 쳐다봤잖아. 한국인이라서 혼자 내심 반가워하기도 했어. 건물 끄트머리만 나오게 이어 붙인 사진 작품도 좋았고...작품 개수는 10점도 안 되는데 그 열 점도 안 되는 게 마음에 들어서 한 3-40분인가 머물렀던 거 같아. 고요함과 평화로움도 한몫했겠지. 괜히 쫓기듯 작품 탐닉하던 나한테 쉼표 같은 곳이었어, 여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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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투어는 이렇게 막을 내리도록 할게. 나도 쓰면서 오랜만에 사진 훑어봐서 좋았어. 원래 그래서 글만 가득 채우다가, 내가 느꼈던 걸 오롯이 전해주면 좋겠단 마음이 들어서 황급히 일요일 저녁에 사진도 추가해서 보내. 보정도 안 한 사진이지만, 그래서 그 날것의 시간과 이미지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러고보니 작년엔 아직도 뉴욕에 머물고 있던 시간이더라. 언젠간 또 뉴욕에 가고 싶어. 거기서도 지금처럼 글을 쓰며, 이땐 한국에 있었지, 하고 싶고. 이뤄질 수도 안 이뤄질 수도 있지만, 그런 상상은 늘 즐거우니까. 물결은 물결답게 다가오는 물살과 파도와 어우러져 가야겠지. 자, 그럼 우린 또 다음 주에 보자. 그땐 조금 더 소소하고 사소한 에피소드를 담아올게. 안녕, 샬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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