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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따뜻하고 다정한 시간들을 보냈니? 나는 바빴고, 아팠다가, 회복한 직후야. 아파서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나흘을 보내다가 가까스로 나아서 이런저런 일정을 소화하고 자리에 앉았어. 참, 나 커튼 바꿨다. 하얀 시폰 커튼이랑 윤슬이 반짝이는 물결 커튼이야. 혼자 바꿨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대견해하면서 창을 자꾸 보고 있어. 책상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로 창이 보이거든. 희고 파란 풍경을 보는 게 좋아서, 보지 않아도 오른 시야에 담기는 희끄무레하고 파르스름한 색이 좋아서 마음이 차분해지더라. 내 소소한 기쁨과 즐거움이, 편지를 읽는 너에게도 전해지길 바라며. 길고 긴 이야기를 이제 조금씩 풀어볼게.
미국은 반쯤 충동적이었어. 회사 재정 문제로 잘렸거든. 벌써 작년 여름이니까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뉴욕에 지인이 있으니 숙소 문제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해결될 것 같고, 퇴직금에 월급도 포함하면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 같아. 늦여름에 세운 계획은 가을에 실행했는데, 별다른 이유는 없어. 그때 비행기가 제일 쌌거든. 그래서 가기 전 두 달 동안 영화제 일을 했는데…짜릿한 경험이었어.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쉽지 않지만 해야 했다." 이때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사람한테 질릴 대로 질려서 모든 연락을 두절하고픈 마음밖에 없었지. 난 스트레스 받으면 잠수 타고 도망치는 성격이거든. 물론 어지간한 걸로 그러진 않고,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야 그러긴 한데…이땐 다 필요 없고 뜨고 싶다, 는 생각만 가득했던 것 같아. 일례로 밤에 퇴근하는데 버스에 핸드폰 두고 내려서 잃어버린 적이 있거든. 나름 찾으려고 노력하긴 했는데 필사적으로 하진 않았어. 없어지든지 말든지, 그래, 차라리 아주 없어져서 아무 연락도 안 됐으면 좋겠다, 하는 심정이었거든. 고의로 한 것도 아니고 사고니까 연락하지 않을 타당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어. 물론 나랑 밤마다 같이 일했던 D 덕분에 찾았지만, 정말 그런 연락용 수단이 너무…너무, 지긋지긋하고 답답했어.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단 충동과 마음만 무럭무럭 커갔지.
근데도 이상하게 떠나는 주의 주일에 갑자기 너무 감정이 북받쳐서 울었어.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떠나는 게 무서웠던 거야.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지인이 있다곤 해도) 혼자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5주를 낯선 대륙에서 머문다는 게 갑자기 너무 확 와닿아서. 내가 말했던 것 같은데, 혼자서 뭐든 해야만 한다는 성격이라서 가서도 혼자 어떻게든 버티고 견뎌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었던 것 같아.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어도, 그때 내 마음은 걱정 끼치지 말고 잘 다녀와야 한다는 이상하고 슬픈 강박으로 빳빳하게 굳어있던 거지. 그래도 그때, 가기 전날 다른 D의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함께했거든. 메뉴도 기억나. 가면 한동안 못 먹을 거라고 김치찌개 시켜 먹었어. 먹으면서, 가서 힘들면 연락하라고 해줬는데, 그게 참 힘이 되더라. 말이란 건 늘 참 신기하지 않니. 거기에 얼마큼의 진심이 담겨있든지 관계없이 힘이 되고 사랑이 될 수 있다는 게.
싱숭생숭함, 이상야릇함, 설렘, 두려움 따위의 느낌과 감정과 생각을 엉망진창으로 마음에 쑤셔 넣은 채 공항에 갔어. 다섯 시간 전에……난 원래 일정이나 약속이 있으면 여유롭게 가는 편이야. 급하게 가서 뛰고 난리 치는 게 더 피곤하니까 그냥 일찍 나가서 느긋하게 구경하는 게 좋더라. 물론 다섯 시간은 심했지만…예전에 인도네시아 선교 간 일 빼면 이렇게 길게 비행기 탄 일이 없어서 더 빨리 가야겠다 싶더라고.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좋았어. 수속 다 밟고 푹신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스타벅스 커피랑 토마토 바질 크림치즈 베이글 마시고 먹으면서 책 읽었거든. "분명 대기하는 시간이 길 거야!" 해서 밀리의 서재에 "눈물을 마시는 새", "피를 마시는 새" (P.S. 명작이니 다들 읽어보세요) 전권 오프라인 다운 받아서 갔거든. 그거 차근차근 읽으면서 인스타그램엔 아무것도 안 올린다고 선언 아닌 선언을 올리고 떠났지. 한국을.
지긋지긋해했던 시공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