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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친구야. 새삼스럽지만 나는 안녕이란 말을 좋아해. 인사도 되고 소망도 되잖아. 네 삶과 순간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 짧은 단어에 담을 수 있는 거지. 샬롬도 그래서 좋아해. 난 편지를 쓸 때 꼭 끄트머리에 샬롬을 붙였어. 그게 무슨 뜻이냐면 히브리 말로 '평안, 평화'라고 한대. '안녕하세요, 잘 가세요'라고 일반적으로 쓰는 거야. 그래서 이번 편지부터는 첫 꼭지에 안녕을, 마지막 꼭지에 샬롬을 적기로 했어. 네 나날이 평안하고 평화롭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소제목이 웃기지? '자아 상실 XXX'…내가 요새 자주 쓰는 말이야. 정확히 말하면 '자아 상실 노동자'로 많이 썼지. 새로 회사에 들어가면서 노동 자아를 만들어야겠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는데, 그게 자아를 상실한 노동자가 된 거야. 그게 대체 뭐냐고 말할 때마다 질문을 받았는데, 단어 그대로야. 야근을 해도 네, 내 직무가 아니더라도 네, 밥 먹으러 가자고 하면 네…이런 식으로 넵넵 로봇이 되는 거지. 아리송하지? 이러면 뭐가 좋냐면, 화가 안 나. 짜증도 잘 안 나고. 그냥 하는 거니까. 거기에 내 감정과 느낌이 담기지 않았으니까, 아주 단순하게 살 수 있는 거야. 탕비실이 있어서 좋고 창가에 앉아서 좋고 점심이 맛있어서 좋고, 이런 찰나만 잠깐 머물렀다 흘러가는 거지.
사실 이 자아 상실 노동자는 예수님이 말한 내가 죽어야 한다, 에서 따온 것도 있어. 주님을 영접하면 예전 나는 죽고 새사람이 된다고 하잖아. 그럼 많은 것에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아득바득 꾹꾹 눌러 참던 나는 없어져야 하는, 아니, 없어진 거지. 세례받을 때 원래 물속에 풍덩 잠겼다가 나오는 거 알고 있었어? 그게 죽음을 의미한대. 이전의 나는 죽었고, 새로운 나로 부활한 거야. 다시 물에서 벗어남으로써. 물론 나는 이걸 머리로만, 지식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에 아주 자주, 종종, 어쩌면 매번 시체로 살아가고 있었어. 좀비 하나를 등에 짊어지고 다닌 거지. 꼭두각시 있잖아, 실 움직이면 그대로 움직이고 그런 인형. 아마 그런 삶이었지 않을까 싶어. 왜냐하면 내 자아가 속된 말로 존나 세서 죽여도 안 죽더라고. 어느 정도냐면 자아 상실 어쩌고를 그만 말해야겠다 싶은 게, 그 자체가 또 내 자아가 되겠더라. 전에 내가 페르소나를 여러 개 만들어 둔다고 했잖아. 1번 상황일 때 1번 자아, 2번 상황일 때 2번 자아…일하는 지금은 자아 상실 노동자 자체가 자아가 되는 거지. 무슨 생각까지 했냐면, 이 자아 상실 노동자를 캐릭터(브랜드)화해서 팔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어. 표정은 로봇인데 옆에 '즐겁다!', '행복!' 이런 스티커 붙인 캐릭터라든지…분리해서 만드는 게 너무 익숙하니까, 그래 예전의 나는 이제 죽고 없어, 나는 새 사람이야! 해도(그마저도 내 결단으로 한 게 아니라 이미 그런 거라고 인지하고 기도했는데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NEW가 아닌 OLD-2023-01 뭐 이런 게 생겨난 거야. 나를 죽인다는 건 정말 말도 안 되게 어려운 거구나, 평생 다듬고 갈아야 할 건 아는데 이게 진짜 말도 안 되게 어려운 거구나 싶더라.
이거에 대해서 한 친구랑 얘기했거든. 자아 상실마저 자아가 된다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이렇게 얘기해줬어. 자아 죽이는 것과 더불어 거기에 주님을 채우는 게 한 세트 같다고. 그렇지만 죽이는 것부터 하지 말고 채우는 것부터 하면 저절로 자아가 밀려나지 않을까? 죽이는 것만 생각하면 너무 힘들고 어렵잖아.
신선하고 고마운 대답이었어. 난 말한 걸 곧이곧대로 듣는 성격이기도 해서, 죽이라 그러면 죽이는 걸 먼저 생각하거든. 과정, 처리되는 단계를 떠올려서 그런 것 같아. 죽음 → 비워짐 → 채움 → 완성! 이건데 1단계부터 깨끗하지 않으니까 자꾸 죽어라 나! 이 짓만 반복하고 있던 거지. 이건 공정이 아닌데. 그 말을 들으니까 문득 또 떠올랐어. 요새 하나님이 나에게 준 메시지는 기다림이었거든. 기다려, 네가 먼저 사랑으로 채워져야 해. 네 안에 내가 널 얼마나 각별히, 특별히 사랑하는지에 대한 확신과 사랑으로 채워져야 해. 그러니까 네 시간, 뜻대로 안 된다고 초조해하지 말고 기다려.
어쩌면 내게 필요한 건 그런 식으로 새로운 자아를 만들고 상실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그냥 순간의 겹겹을 지나치는 시간일지 모르겠다. 아니, 그게 맞을 거야. 연한 하늘을 바라보며, 덥고 습한 공기를 맡으며, 사랑한다는 목소리를 들으며, 경청하는 눈빛을 담으며, 확실하고 또렷하게 널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메시지를 읽으며. 각양각색의 그러나 분명한 사랑을 느끼며. 그 사랑이 거대해지면 내가 상실 운운하지 않아도, 예전의 나는 쫓겨나고 오직 사랑만이 영을 뚫고 나와 마음과 행동과 말을 채우겠지. 그게 새 사람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게 성령 충만한 게 아닐까? 오롯이 사랑으로, 두려움 없이 다만 손을 뻗을 수 있고 기다릴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다가갈 수 있는 거 말이야.
그러니까 과거 없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 말이야. 그 모든 옛날과 옛적과 과거를 잊고, 겁 없이 사랑을 받고 주는 사람. 자유로워진 사람. 그게 진짜 자아를 상실하고 새로운 사람이자 사랑이 된 나겠지. 너기도 하고. 우리 모두일 거야.
나는 또 그렇게 살아볼게. 죽이려 드는 게 아니라 밀려오는 해일 같은 사랑을 맨몸과 마음으로 받아내서, 가득가득 채워서. 이미 그렇게 됐고 그렇게 되리란 걸 믿으면서, 구하면서.
네 매일도 그러길 또 바라, 친구야. 그럴 거야. 분명히.
자, 2주 후에 또 보자. 그때까지 건강해.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