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 잘 지냈어? 무더위, 라고 말하기도 뭣할 정도로 뜨거운 나날이었어. 나가면 숨이 턱 막히더라. 이럴 때일수록 스스로 잘 챙겨줘. 에어컨 너무 많이 쐬지 말고, 물 많이 마시고. 나는 늘 그렇듯 파도가 풍랑처럼 덮쳐온 시간을 보내기도,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가뿐하고 홀가분한, 완전히 새로운 마음이 되기도 한 다양한 결의 하루들을 보냈어. 언젠가 이것들도 나눌 수 있겠지. 마음에 파도가 지문처럼 새겨져 물결 무늬가 되는 날. 어느 훗날에. 지금은 아니야. 오늘 얘기할 건 다른 거거든.
친구에게 너도 편지 써보면 어때? 물어본 적 있었어. 그 친구도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또 다른 환기가 되지 않을까 했거든. 친구는 무섭다고 했어. 사생활을 쓰는 건 무섭고 어렵다고. 알아. 이해해. 맞아. 그래서 내가 처음부터 모두에게 보여주지 않았잖아. 몇몇에게만 말했지. 날것의 감정과 생각이 찐득찐득하게 묻어난 편지를 말이야. 공개한다는 건 나를 잘 알고 애정을 갖고 다정하게 봐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인연이 끊어진 사람들, 안 좋게 헤어진 사람들, 생각 없던 이들, 이름 정도만 인식하거나 아예 모르는 사람들도 본다는 거니까. 게다가 난 나에 대해서 뿐 아니라 내게 벌어졌던 일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언급하는 수준이거든. 보통 목적이 있어야 말하고 사소한 이야기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자주 말 좀 하라고 한 소리 들었어. 주제마저 나눠서 얘기하는데(사람을 카테고리화해서 반응하는 사람인데 대화 주제도 당연히 그러겠지), 모두에게 어떻게 해석될지 모를 내밀한 이야기를 한다…미친 짓이긴 해. 근데도 굳이 하는 이유는 단순해. 하고 싶어서.
왜냐면 나도 그 글과 문장과 단어를 통해 용기를 얻었으니까. 누군가의 약하고 바보 같은 면이 내겐 큰 용기와 위로를 줬으니까. 옛날에 봤던 웹툰 중에 이런 나레이션이 있었어;
정리를 마치면 친구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들의 반응은 걱정되지 않는다. 이 얘기를 공개하는 순간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긴 시간 동안 그녀가 살아올 수 있었던 한 부분이 되어준 이들에 대한 감사이자 결산 보고였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이 웹툰이 가족에게 성폭행당한 후 상담하는 내용을 그려냈던 것 같아. 피해자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사실과 감정을 추슬러 친구들뿐 아니라 우리한테도 보여준 거였지. 이걸 보고 되게 신기해서, 멋져서 이 부분만 캡처해 뒀지. 걱정하지 않는다. 공개하는 순간도 중요하지 않고…지금이나 그때나 난 무서운 게 참 많거든. 착하고 좋게 보이고 싶으니까 당연히 착하고 좋고 깔끔하고 예쁜 것만 보여주고 싶지, 구질구질하고 추잡하고 허접한 건 보여주고 싶지도 않은 거야. 그걸 보여주면 나를 거절하거나 쫓아내거나 밀어낼 것 같아서. 어떤 경멸이나 혐오의 시선으로 볼 것 같아서…
그러다 안 거야. 알았다기보단 자문했어. 넌 어떤데? 넌 다른 사람의 나약한 면을 봤을 때 싫다고 도망쳤어? 그 사람이 필사적으로 낸 용기, 잔뜩 구겨지고 더러워진 걸 부들부들 떨면서 내민 고백을 징그럽다고, 무섭다고 튕겨냈어? 아니. 아니야. 웹툰 하나, 글 하나에도 용기를 얻어선 울던 걸 그치고 다시 걸었지. 고맙다고 해주고, 된다면 내가 너의 용기나 다정이 되어서, 같이 가보자고 말해주고 싶었어. 괜찮다고. 그것들은 지나갈 거고, 너에게 흉터나 흔적을 남기겠지만 그뿐이라고, 가버릴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
그래서 쓰는 거야. 두려워도 불안해도, 어떤 왜곡과 오해가 내게 따라붙을지라도, 누군가, 어떤 한 사람에게는 내가 받았던 것과 비슷한 다정하고 따뜻한 위로를 받을지도 모르니까.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고 하지.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이젠 그런 거절 당할까 봐, 밀릴까 봐, 응답이 없거나 찬 시선을 받아도 괜찮아. 난 알았거든. 살아오며 겪어온 모든 일과 생각은 다른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소망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안 정도가 아니라, 체득했으니까.
그러니까 계속 쓸 거야. 너에게 가장 진실한 모습으로 다가갈 거야. "혼자만의 경험을 넘어 다가가는 말"을, 계속 말해줄게.
언젠가의 너에게, 가장 힘들고 추운 순간에 한 움큼의 빛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