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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기억은 아니고, 다 기연미연한 것들인데도 쓰기가 참 어려웠다. 감정과 느낌이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막상 자판을 두들기려고 하면 눈만 꿈벅거리고 있었다. 친구가 말한 대로 상담을 받아 가며 풀어야 할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풀기로 결심했고 이 방법을 선택했다.
처음부터 어수선했다. 백여 석이 채 안 되는 의자엔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고 뒤에는 마무리 준비를 위해 임원단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미리 뽑아온 문서를 한 자라도 더 외워보려고 앞자리에 앉았는데, 바로 테디가 달려와 속닥거렸다. 사람이 모자란다고.
2019년 초 개정한 회칙에 따라 총회는 전체 정회원(셀-소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의 3개월 셀 출석률 과반수가 와야 열리는데, 그 인원을 못 채워서 총회가 열리기도 전에 빠그라들 지경이었다. 원고고 뭐고 테디와 샤샤에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빨리 데리고 오라고 했다.
그때 사람들은 마을 모임과 총회를 정말 안 좋아했다. 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치도 의미도 없다 여긴 듯싶었다. 마을 모임 한다고 했을 때 안 오는 건 예사고, 어떤 셀은 나가서 자체적으로 셀 모임을 하기도 했다. 생일 축하와 게임으로 이루어진 모임에도 이러니 총회는 더 가관이었다. 듣기론 대다수가 살벌하고 날카로운 분위기가 싫어서 안 간다고 했고 그 분위기를 바꿔보는 게 어떻냐는 이야기도 나중 가서 몇 번 들었지만, 그땐 다수의 이야기는 들리지도 않았다. 소수의 이야기, 목소리만 몇 배로 크게 들려왔고 꽂혔다. 6년이 지났는데도 그런 목소리가 더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크기 때문일까, 수와 상관없이 우렁우렁 울 수 있는 거대한 성량 때문일까 하는 황당한 감상도 동시에 떠올리게 된다.
테디와 샤샤에 더해 (아마도)판판까지 밖으로 내보낸 후엔 앞으로 나가야 했다. 앞줄부터 채워 주세요, 말하기도 전에 얼굴이 제각각 딱딱하게 굳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오. 한껏 마음의 준비를 한 사람들이었다. 늘, 날 떨떠름해하던 사람들. 불티를 지지하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나란히 착석한 채 안내 방송하는 나를 보고 있었다. 기도한 게 무색하게 속이 울렁거렸다. 얼굴에도 티가 났을까? 모르겠다. 그날 머릿속에는 '잘 마무리 짓자'라는, 정언명령 급의 전제만 있었다. 그래서 다른, 따로 체크해야 할 사항은 모두 안개 속에 묻힌 것처럼 뿌옇기만 했다. 기억을 파헤쳐도 사람들이 지은 표정과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몸짓이나 기억나고 말 뿐이다.
뒤에서 검은 양복을 입고 우르르 서 있던 교역자들, 입 모양으로 벙긋거리며 말을 전달하려고 애쓰던 단풍과 테디, 모니터에 코를 박고 열중한 메이와 단피, 차가운 얼굴, 하나둘 어슬렁거리며 들어오던 걸음걸이, 분홍색 카드를 건네며 명단을 확인하던 이더, 걱정하는 눈빛, 안타까워하는 눈, 친한 사람끼리 시시덕거리던 무리, 이런 것들. 그 안에 너무 깊숙하게 속해서 다른 게 하나도 눈에 안 들어오고, 오직 그 장면만 사진으로 박제한 것처럼 남은.
고장 난 컴퓨터처럼 아직 인원이 안 차서, 사람이 안 와서, 잠시만, 곧, 하면서 언제 시작할 수 있나, 초조해하는 내게 결국 긴 톡이 왔다. 인원수와 출석률 따위를 말해주고(물론 총회 끝나고도 이해가 안 갔다.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야 이해했다), 출석 인원 찼으니까 이제 바로 하면 된다고. 마침내 '착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말고 할 말이 생긴 셈이었다. 서둘러 PPT 슬라이드를 넘겨달라고 했다. 용기가 없었고, 배짱도 없어서, 뭐든 그저 빨리 끝내고 싶었다. 초장부터 꼬여버린 판에 고동 소리가 귀에 울릴 정도로 크게 터져서 차라리 우황청심환이나 알레르기 약(교감신경 활성도를 낮춰서 신경이 안정됨)이나 먹고 올 걸, 때늦은 후회를 하기도 했다. 목차가 떴다. 우리 총회는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겁니다, 말을 막 떼려는 순간이었다. 앞쪽에서 손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
"지금 출석 인원이 모자란 것 같은데 이렇게 바로 목차로 넘어가면 안 되지 않나요?"
불티였다.
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