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는 늘 어렵다. 가끔 순간적으로 와닿는 문장과 단어가 아니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하고 싶기는 한 건지 알 수 없어 사두고도 외면하기 일쑤다. 집에 시집이 총 네 권 있는데 하나도 끝까지 읽은 게 없다. 이럴 거면 사지 말지! 싶으나 시라는 건 정말 마법 같아서, 순간 들이닥친 낱말의 음절과 어절 하나하나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거다. 이 시집도 그렇다.
친구가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올린 시, 100자도 안 되는 토막 난 문장이 폭우처럼 쏟아졌고, 냅다 이 시집은 뭐냐고 물어봤고, 마음씨 좋게 빌려줬고, 난생처음 2주 만에 완독했다. 그러나 소설과 다르게 뒤가 흥미진진하거나 어떤 흐름과 구성으로 서사를 맺을까 기대돼서 읽은 게 아니다.
시는 한없이 쓸쓸하다. 내게 그이의 시는 다 이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화자는 광막하기 짝이 없는, 끝없이 거칠고 메마른 사막을 걷고 있다. 비가 계속 온다. 장대비가 줄줄 쏟아지지만 빗방울은 표면만 잠깐 적시고 재빠르게 증발한다. 마르고 축축한 땅, 우산 하나 없이 그는 꿋꿋하게…희망의 반대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꼿꼿이, 계속.
덜덜 떨며 서로를 안고 있는 성냥개비들
그럼 더 큰 불이 날 줄도 모르고
고통을 나눠 가지려고 하면
더 큰 고통이 된다고
내가 낳은 성냥개비들에게 말해줄 순 없었다
(중략)
더 큰 불
나는 지구 규모의 화재를 상상하고
다른 모양으로 가물다가
결국엔 같은 재로 스러질
나무와 무리와 내가 마음에 든다고
말해야만 했다
침대에 바르게 누워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집과 정원이
불타고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런 시. 이런 문장들. 이런 단어들.
읽는 내내 마음에도 한 아름 내려앉던 쓸쓸함. 슬픔. 그러나 차분한. 어쩌면 친구가 시집을 빌려주기 전 해준 말이 내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정말 천재 같은 시인인데 일찍 떠났"다는 말이. 이미 현재도 미래도 볼 수 없게, 이다음이 어떨지 궁금해지는 소망도 기대도 박살 난 채 보기 때문에. 언젠가 바래질 시 60여 편만 남긴 채 훌쩍 떠났기 때문에…그의 모든 시가 더 이상 새로움 없이 덮여버릴 걸 알아서.
그런 사람이 전에도 있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로 어쩌다 본 거였는데,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쉐프가 일찍 여읜 친어머니 대신 어머니처럼 여기며 찾아뵙던 분이 돌아가시자 그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 내용이었다. 주인공이 정말 혼신魂神을 다해 음식을 만들고 사흘 밤낮 장례를 치르는데 그 열의와 진심이 너무할 정도로 비장해서 눈도 못 떼고 봤다. 울렁이는 마음과 눈가를 삼키고 이 사람은 지금 뭐할까, 다큐멘터리 이후 시간이 꽤 지났는데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유명한데 왜 프로그램엔 안 나올까 궁금해하며 찾았는데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기사와 마주해야 했다.
그래서 슬프다. 미래가 닫힌 사람,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희미하게라도 볼 수 없는 사람이 남긴 흔적들을 보고 있으면.
좋아했던, 좋아하려고 했던 사람을 죽어서는 만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조금 더 어릴 땐 그런 믿음을 가졌다. 종현이 죽었을 때 그랬다. 유별나게 좋아한 게 아닌데도 울었고 멍했다. 불안하고 씁쓸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건 막연하고 빈약한 사후에 대한 낙관과 믿음밖에 없어서 소망해야 했다.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나도 몰랐지만 생각보다 많이 좋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하고.
시인이 그래도 삶을 조금은 사랑하고 갔을까. 그랬다고 생각한다. "남자 애인과의 관계에서 폭력을 경험한" 적 있고, 그 애인을 "몇몇 시에서 '신'으로 묘사"했을 정도로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그래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사랑을 위해, 살기 위해, 빠져나갈 구멍을 모색하기 위해 사랑이란 이름 아래 퉁칠 수 있는 많은 시도와 각오와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공터인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사랑할 것이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에. 중학생은 자신이 사랑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떠올리면서 담배를 피우고.
태초에 의자가 있었다 나는 그 의자에 앉았다 그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의자의 다리를 부러트렸어야 했는데
빛이 나를 감쌀 때
내 발밑엔 그림자도 없고
어쩌면 내가 빛일 수도 있겠다,
시소도 미끄럼틀도 작은 오두막도
내가 있어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위에서 말했듯 시인은 그래도 "꿋꿋이" 가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이 사랑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을" 중학생 때부터 내내 "떠올리면서". 그렇지 않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려고 발악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사랑했던 존재와 존재했던 기억을 써 내려가지 않지 않을까. '씀'이라는 행위를 통해 역설적으로 괴로움을 떨쳐내고 살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시를, 끊임없이 이건 시야, 그냥 시라고, 말함으로써 시의 세계 바깥에 머물기 위해. 현재와 현실에 머물기 위해.
모른다. 그냥 이 모든 건 이제 추측이 됐다.
"누가 멀리서 걸어온다. 3분의 2쯤 걸어왔을 때, 갑자기 걸어오던 사람이 사라진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지 않고 갑자기 끝이라는 글자가 뜬다. 그걸 보던 사람은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고 화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줬다. 이미 오랫동안 걸어왔다. 너무 오랫동안 걸어왔다."
그러니 그냥 그가 쓴 시와 산문을 조용히 촘촘히 읽으며 바깥의 삶을 살아야겠지. 그가 꿈꾸던 바깥, 시 바깥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때때로 기억을 더듬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