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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항상 강렬한 시간만 남겨둔다. 아마 그 시간과 순간이 갑작스러운 재난처럼 강렬해서 다른 것들, 이를테면 전후 관계나 말이나 얼굴은 다 지워진 게 아닐까. 덕분에 준비할 때 기억은 아래 세 가지 정도가 전부다. 그마저도 정확하지 않다.
1번: 메이가 프레젠테이션을 만들기로 했다. 만들어 온 건 우리 예상보다 시커멓고 강렬해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보이기는 할지 의문인 화면이었는데, 그때 나는 상처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서 괜찮다 하고 넘겨버렸다. 그러니까 이건 잘못된 감싸주기의 예시다. 나중에 연말 예산 책정 에피소드 얘기할 때 언급하겠지만, 팀원을 보호한다는 건 무작정 잘했다고, 괜찮다고 감싸주는 게 아니라 잘못했거나 수정할 일이 있으면 같이 고치고, 합의해야 한다. 다 같이 이해하고 알아둬야 한다. 그래야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혼자 아니라 '우리'로 대응할 수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땐 이 친구들이 안 보고 못 봤으면 했다. 뽑아온 책임이 있지, 너무 적나라한 민낯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던 거다. 그래봤자 볼 건 다 보게 되고, 알게 된다는 걸 알았다면 나도 그들도 서로 대하는 게 달라졌을까?
물론 이더가 한소리 했다. 저게 맞냐고. 이더는 여러모로 참 나와 달랐고, 학생회까지 했던 사람이라 희한하게 권위적이었다. 나이가 어려도 직책이 높으면 깍듯이 순종(복종이라고 했나, 아무튼 둘 중 하나를 즐겨 썼다)했고, 일 년 내내 회장은, 회장이란, 회장이란 건, 하면서 권위와 위계에 대해 설교했다. 내가 임원으로 있으며 배우고 본 모습도 그렇고, 옆에서도 권위와 강함에 대해 줄기차게 얘기하는 바람에 어지간한 사람 이야기를 잘 듣는 사람이던 나는 센 척 강한 척, 맞지도 않는 껍질 뒤집어쓰고 한 해를 다 보냈다. 한여름에 쓴 인형 탈처럼 뜨겁고 단단했고, 안에서 속절없이 곪아가는 게 투명하게 보여서, 보다 못한 사람들이 그만두라고 충고했다. 충고가 먹혔다면 충고가 아니었겠지…. 그러나 이 이야기는 넘어가도록 하자. 나는 이 정도면 보일 거라고 했고, 사람들은 어차피 아웃리치에나 관심 보일 거며 그건 다른 친구가 만들어서 잘 보인다고 설득 아닌 설득을 했다. 이더는 영 탐탁지 않았지만 권위론자답게 억지로 이해하고 넘어갔다.
2번: 단피가 하소연했다. 이유인즉슨 왜 자기는 계속 이것만 해야 하냐는 거였다. 다른 걸 해보고 싶다 했다. 뭘 하고 싶은데, 물어봤는데 대답이 기억에 없는 걸 보니 그 애도 나도 뚜렷한 대답을 하진 않은 것 같다. 아니면 스트레스를 너무 받은 상태라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걸 수도 있고. 장소만 또렷하다. 6층, 문과 문 사이 좁은 공간에서 나가고 있을 때였다. 저 이제 다른 거 하고 싶어요. 언제까지 이것만 해요? 저 이것만 하려고 들어온 거 아니에요. 이런 뉘앙스의 말이 줄줄 내뱉어졌다. 절여진 정신으로 먼저 든 생각은 '그래서?'였고, '지금 그래서 뭘 어쩌자고?'가 그 뒤를 이었다. 이 일이 끝나면 다음엔 다른 걸 해줄게, 일단 지금은 조금만 더 힘내보자, 같은 상투적인 말이 의식을 대체했다. (진짜로 다른 걸 맡겼지만-기억에 없다. 초반에 말했듯 강렬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초심은 유지되지 않을까. 단피를 데려오려고 늦은 밤에 함께 동네를 걸으며 이야기하던 기억은 분명 나는데, 그때 간절함과 애정은 온데간데없이 짜증과 분노만 찐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이제야 말할 수 있지만 참 부끄러운 일이다. 동시에 안타깝다. 그럴 수 있다 헤아리지 못한 게, 남을 헤아릴 여력은커녕 나조차 추스르지 못해 허우적거리던 것이.
마지막은 나. 이더가 그때 갖고 다니던 꽃줄기 모양 볼펜이 있었는데, 그걸 흔들면서 강력하게 말했다. 외워야 한다고. "이거 네가 다 알아야 해, D. 넌 회장이잖아. 전체를 다 알아야 한다고. 총책임자니까, 넌 어쨌든 다 대비하고 있어야 해." 지금 생각하면 과연 이더도 모든 걸 다 외웠을까, 대비해도 대비되지 않는 각종 변수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지만 이젠 의미가 없다. 기억해서 말해준다 한들 모두 너무 과거의 일이다. 황당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시대 속에서, 이젠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지도 않을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똑같은 방법이 적용될까. 아무튼 100% 외울 순 없었고, 예상 질문과 아웃리치 전반적인 부분만 외웠다. PPT를 프린트한 너덜너덜한 종이 구석마다 뭐가 포인트인지, 중점적으로 말해야 할 걸 휘갈겨 쓴 기억이 있다.
이런 기억 저런 일화를 쌓은 채, 당일 꼬질꼬질한 종이 묶음과 노트북을 들고 예배에 갔다. 집중은커녕 누가 뭘 찬양하고 기도하는지 관심도 없었다. 나는 나의 기도에만 집중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도망칠 것 같아서, 그 기괴한 책임감 하나로 예배를 쌩깠다. 죽이러 달려오는 에서와 만나야 할 야곱처럼, 도망쳤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나러 되돌아 가는 모세처럼, 그 모든 두려움과 시름과 불안을 안고, 아웃리치와 예산과 회계와 사역 보고와 정족수와 총회 충족 인원수 따위를 머릿속에 쑤셔 박고,
예루살렘 홀로 떠났다. 이제 정말 마주쳐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