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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는 참담과 진중이라는 무게에 계속 눌려있진 않았다. 사명과 책임과 의무도 결국 즐거움과 기쁨과 권리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 노트북 들고 두 시간인가 세 시간을, 예배와 회의로 드리고 난 후 휴식이 찾아왔다. 각자 씻고 정리한다고 야단이었는데, 봄과 부들, 레드가 무언가를 미주알고주알 떠들고 있었다. 듣자 하니 바다에 가겠단 얘기였다. 이왕 온 바닷가, 밤에라도 보고 싶다는 말과 몰래 나가면 되지 않느냐 따위의, 속삭임보단 큰 종알거림이었다.
그렇게 얼떨결에 나갔다. 여름이지만 밤은 차갑고 공기는 서늘했다. 숙소와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바다가 있어서, 다들 한껏 가벼운 차림으로 차에 탄 채 이동했다. 이동하는 내내 열어둔 창문으로는 낮과 다른 냉기, 짜고 맑은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이 바람만큼 비가 내렸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은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끝났다. 그때 나는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미 너무 많이 듣고, 말했고, 2박3일이 끝나면 (성지 순례가 있었지만) 여름 총회를 준비해야 했다. 처음부터 진 빠질 일과 고민을 하고 싶지 않아서, 관련된 모든 걸 마음 한 칸에 구겨져라 접어 던지곤 밤바다를 바라봤다.
바라만 볼 친구들은 아니었는지 다들 담요를 둘둘 두른 채 파도가 치는 쪽으로 몰려갔다. 밀려오는 파도 따라 깔깔 웃으며 피하기도 했고, 모래밭에 이름 석 자나 무언가를 쓰고 지우기도 했다가, 묘하게 높아진 텐션 따라 춤도 췄다. 달까지 훤하게 뜬 밤, 바다 앞에서 잔뜩 웃으며 춤춘 기억은 여전하다. 우리는 춤추고 노래하며 그 무거움을 던져버렸다. 끝내도 남은 찝찝함과 불명확한 감정과 감성을 다 춤과 웃음으로 휘발시킨 셈이다.
이튿날 향이 아직 덜 깬 나에게 다가와 천진한 웃음과 목소리로 말해줬다. 일찍 일어나서 근처 숲길을 산책했는데 말야, 너무 좋았지 뭐야. 나중에 같이 오면 좋겠다, 아침에 그렇게 숲길을 걷고 있으니까 참 좋았어, 하면서. 그땐 그렇게 미래가 다가오면 좋겠다, 몽롱한 와중에 생각했더랬다. 책임과 의무와 어쩌고저쩌고, 뭐 그런 무겁고 뾰족한 의식은 다 벗어 던지고 다만 가뿐하고 즐겁게, 산뜻하고 기쁘게 놀러 오면 좋겠다고.
화마와 바다라는 상반된 기억과 감상을 갖고 홍대로 넘어갔다. 그때까지도 '수상한거리'라는 곳에 대해 잘 몰랐다. 단풍이 몇 번 언급해서 알곤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사실 거기서 몇 명이나 그 단체에 대해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두 명이면 많지 않았을까. 꼬불꼬불하고 비좁고 시끄러운 대로와 골목을 지나가다가 문득 그라피티 아트를 하나 발견했다. 초록색과 분홍색으로 점철된 하트 모양 안에 가시 관을 쓴 예수님이 그려져 있었다. 가시 꼬챙이가 잔뜩 달린 관을 쓴 그는 그럼에도 웃고 있었다.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는데 그 그림만 흐릿하게나마 떠오른다.
불구하고 다가오는 사랑은 이제 무어라 묘사하면 좋을까. 적어도 순수한 아름다움은 아닐 것이다. 처절한 숭고, 그래서 침묵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이지 않을까. 그래서 누군가는 불가해한 사랑에 질려 뒷걸음질 치는 게 아닐까. 그래도 어떤 사람은 그 앞으로 간다. 기어서라도.
거기선 우리에게 공연(이라고 말하는 게 맞겠다. 음악회라고 하는 게 적확할까?)을 보여줬다. 어떻게 홍대에서, 번번이 실패만 하던 지역에서 선교라는 걸 할 수 있게 됐냐? 하는 질문과 문화 선교라는 화두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솔직히 답변과 일화는 기억나지 않는다. 전날 담화가 너무 충격적이라 그럴 수도 있겠고, 홍대로 퉁쳐지는 각종 핫플레이스와 우리 동네는 다른 접근방법이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지금 생각과 판단이고, 그땐 그게 멋져 보였다. 그래야 할 것 같았고.
앤은 일공과 함께 먼저 화성에 내려가 있었다. 우리는 북쪽에서 남쪽까지 다시 내려가느라 골머리를 앓았는데, 나중에 테디가 그때 레드와 친해졌다고 살짝 고백했다. 걔네는 피곤하면 더 텐션이 올라가는 이들이었고, 우연히 같은 차에 탔고, 편한 사람만 있겠다 테디는 냅다 노래를 불렀고, 이에 질새라 레드도 장단 맞춰가며 놀고…나는 물론 차가 막히며 발생하는 일정 이슈로 진땀 흘리고 있었다. 회장하기 전까지 분명 MBTI 따지면 INTP였을 것 같은데(검사를 안 해봄) 19년도부터 여러 번 작살난 후로 후천적 J가 됐다. 나쁘지 않지만 좋은가, 하면 모르겠다.
화성이 오히려 몇 가지 여전히 머릿속에 어른거리는 게 있다. 단편적으로 열거하자면 이렇다: 카페로 개조한 교회, 다락방, 목사님의 태도.
헐레벌떡 뛰다시피 간 교회에서, 안 그래도 예민한 불안과 초조함으로 가득 찬 부정적 상상으로 가득한 머리와 가슴을 품은 채 당도한 곳은 인상적이었다. 6년이나 지났으니 과장된 기억이겠지만 빛이 눈부셨다. 높게 올린 천장은 빨간 머리 앤의 초록 지붕 집처럼 삼각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 선을 두고 양쪽에 난 창문으로 늦은 낮 햇볕이 떨어지고 있었다. 도서관처럼 사방엔 책이 비죽비죽 꽂힌 책장이 벽면을 따라 놓여 있었고 밝고 따뜻한 불빛이 온 사방을 고르게 비추고 있었다.
작고 따뜻한 집. 그래, 교회인데 집처럼 느껴졌다. 바로 뒤엔 카페 테이블에 각종 기기며 도구가 널브러져 있는데도 편안했다. 너무 거창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언제든 누구든 환대할 것만 같아서.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