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한 날이었다. 서늘하다 못해 시리고 냉혹한 서릿발이 우리 몸과 마음을, 영혼을 끊임없이 상처 입히고 있는 오늘을 떠올리면서. 하나님을 믿는 나는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 이런저런 말과 행동을 한다. 종교가 없다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면 되겠지. 그렇다면 부끄러움, 부끄럽지 않다는 건 뭘까.
말할 수 있는 것. 입술이 떨리고 목소리를 더듬어도 내뱉을 수 있는 것. 그게 '부끄럽지 않음' 같다. 누가 물어봐도 대답할 수 있는 것. 설령 그게 내 자신이라도.
2019년 늦가을이 그랬다. 그때 돌이켜보면 그래도 가장 부끄럽지 않은 시간이었노라고, 적어도 나는 나와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을 최선, 과부의 두 닢 같은 최선을 냈다 고백할 수 있다.
-
여름에 아웃리치가 있었고, 총회가 있었다. 연초 개정한 회칙에 따라 상, 하반기 두 번 열리는 총회 중 처음 열리는 거였다. 지금은 둥글고 빠르게, 30분도 안 되어 끝나는 회의지만 이땐 살벌했다. 꼭 주주총회나 평가회 같았다. 우리 임원단은 나름대로 준비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개회 전부터 개판이었는데, 사람들이 들어오질 않았다. 임원단 몇 명이 나가서 들어오라고 소리도 치고 사정도 했는데 소 닭 보듯 구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중에 테디가 말하길, 눈빛이 차가웠다고 했다. 그건 너희 일이지 내 일이 아니라는 듯, 성가시게 왜 그러냐는 듯 말하는 것 같았다고.
시작이 엉켰는데 중간이라고 좋을 리 없었다. 정말 별별 일이 있었다. 불티는 목차부터 태클 걸었다. 순서가 틀렸다고 했나, 무어라 말했고, 예산 보고할 땐 사람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양 질문인지 비난인지 모를 것들을 쏟아냈다. 멀쩡한 질문 찾기가 어려웠다. 물론 우리 회계 잘못도 있었다. 그렇지만 '회사에서도 이렇게 안 한'다며 성내는 거나, 공동체 회의에 참여해 놓고 공동체 회장인 나한테 '넌 누군데' 삿대질하며 외치는 건 뭘 원하나 싶었다. 진짜 개싸움이라도 벌이고 싶었던 걸까? 지금이라면 '제가 회장인데요, 회장 얼굴도 모르고 들어와서 말하시는 거예요 지금?' 하고 냅다 꽂았겠지만(요새 화가 많다)…당시엔 그리 배포가 크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기절하지 않은 게 용하다 싶다. 사람들은 계속 웅성거리고, 목소리 큰 사람은 소리치고, 불티는 아예 지금 예산 보고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고, 맨 뒤에서는 알아보지도 못할 수신호를 보내고…
아웃리치 보고 때도 비슷했다. 솔직히 말해 총회 내내 분위기가 어둡고 무거웠다. 좌절감 비슷한 것도 있었다. 이 사람들은 내 말 들을 생각조차 안 하는구나, 싶어서. 안 그런 사람들이 많았지만 희한하게도 내 시야엔 그런 사람들, 그런 눈초리만 걸렸다. 냉랭함, 무관심, 실망 따위. 그럴 줄 알았다, 그러면 그렇지 따위.
보고 끝나고 들은 말이 생생하다. '너무 나이브하다'. 다른 건 어찌저찌 넘어갔는데 그 말이, '나이브'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제일 충격이었다. 뭐라 그러지, 나 개인도 아닌 우리, 2박 3일 동안 답사하며 보고 듣고 이야기한 모든 결론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내가 원한 의도는 이 과정을 통해 구성원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하며 의견을 내보자, 였지만 사람들이 바란 건 하나의 결론이었다. 정확하고 구체적인 방법. 확실한 결과.
총회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끝나고 또 울었다. 물론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후였다. 빈 공간에서, 뒷정리 때문에 남은 임원단을 제외하고 파도가 쓸려나간 것처럼 막막한 거기서 울었다. 사람들도 싫고 하나님도 너무 원망스러웠다. 욥의 심정이 살짝 이해가 갔다. 애정으로 시작한 일에 뭐 이리 무지막지한 비난을 받아야 하냐고, 돈이나 주고 욕하면 억울하지도 않지 제대로 관심도 주지 않다가 막상 보고하니까 왜 그딴 식으로 하냐고 하이에나처럼 물어뜯기나 하냐고.
그런 여름이었다. 무자비한 여름, 사람이 무서웠던 여름.
그 뒤 나는 밤마다 기도실에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