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만큼, 그러나 희와 다르게 날 사랑해 준 사람도 있었다. 봄. 봄은 그 해 처음 부임했던가, 그랬던 것 같다. 사실 봄은 나와 접점이 없었다. 사실 봄은 내게 그러지 않아도 됐다. 사실 봄은 그가 맡은 사람들과 사역만 신경 써도 됐다. 사실 봄은 그렇게, 정서적으로 다가오지 않아도 됐다.
그럼에도 봄은 그렇게 했다.
봄이 한 일은 크지 않았지만 하나하나가 또렷했다. 나는 봄과 나눈 대화가 다 떠오르지 않고, 봄이 내게 해준 여러 감명 깊고 인상 깊은 말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며 눈시울이 살짝 뜨겁다.
보통 교역자와 성도는 아주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각 교회마다 사람마다 다르니 내가 겪은 게 일반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곳은 그랬다. 친밀하되 건조한 느낌, 내 속은 터놓아도 당신의 속은 잘 모르겠는, 알쏭달쏭한 느낌. 깊은 물이지만 끈적하지 않은 느낌. 나는 그걸 기꺼워했다. 적당해서 좋았다. 2016년 임원단 시절 감이 그런 얘기를 했다. 친해지려면 그 밑바닥까지 봐야 한다고, 그 끝까지 샅샅이 알아야 한다고. 떨떠름했다. 뭘 굳이 그렇게까지, 상대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밑까지 보려고 그럴까? 구질구질한 면 봐서 뭐 하나, 하는. 나는 그 모든 건조함, 적당함, 매끄러움이 좋았고…어느 선 이상으로 넘어가려 들지 않았다.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선 이상으로, 넘어오지 않길 바랐다. 할 수 있다면 명확히 그어주고 싶었다. 여기까지야, 들어오지 마. 깔끔하게 지내자.
봄은 그러지 않았다. 그때 마을장이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소그룹인 셀보다 상위 규모인 중 그룹-마을-을 운영하는 역할이라고 보면 된다. 여름이는 봄이 맡은 마을 마을장으로 사역하는 중이었는데, 이런 말을 했다: 봄은 교역자 같지 않아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교역자보단…친한 자매 형제 같아요. 그 말 그대로였다. 봄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뜻밖의 사랑, 접촉하고 털어놓는 사랑을 자유롭게 나눴다.
기도회 후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울었다. 이유도 기억 안 난다. 화가 나고 답답해서 욥처럼 (속으로) 울부짖었다. 다 싫다고, 이 모든 게 지긋지긋하고 싫다고, 나한테 왜 자꾸 그러냐고. 싫어요, 싫어요, 싫어요. 다 싫어요. 한참 그 말만 내뱉다가…나왔다.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계속 났다. 울기 싫고 운 모습 보여주기도 싫은데 웃어도 눈물이 자꾸 났다. 어설프게,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꼴로 나갔는데 말랑이가 먼저 날 꼭 끌어안았다. 정면에서 눈을 마주친 탓에 피하기도 웃긴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그게 좋았다. 내가 보낸 각종 수동적 부정 신호에도 불구하고 안아준 애정이, 온기가.
뒤이어 봄이 날 안아줬다. 뜻밖이었다. 정말로. 그간 내가 알아오고 지낸 교역자들은 앞서 말한 대로 친밀하고 건조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희와는 나중 가서 더 친해졌지만, 이땐 그렇게 서로 안아주는 사이가 아녔다. 굳이 덧붙이자면 희나 나나 스킨십에 살가운 편이 아니라 그랬을 거다. 봄은 아니었다. 봄은 우는 날 발견하고 다가와 자연스럽게, 아주 당연하게 안아줬다.
그래야 한다는 듯, 우리의 직책이나 위계나 다 상관없이, 다만 우는 이를 위로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나는 그때 봄이 좋아졌던 것 같다. 아니, 좋아졌다.
"미안해."
여름이었다. 그 계절에 봄은 '스포츠 선교'라는 주제로 아카데미를 진행했고, 나는 제대로 참여하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등록했다. 겨우 나간 게 스킨스쿠버 수업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저녁 먹으면서도 봄은 교역자답지 않게, 그러나 봄답게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공간은 고요했다. 어떤 얘기들을 나누다가 봄이 돌연 말했다. 미안하다고.
"뭐가요?"
"그냥, 우리가(내가) 미안해. 잘 지켜주지 못해서."
당신이 나를 왜 지켜준단 말인가? 미안할 일은 또 뭐람? 두 번째 충격이었다. 봄이 이어서 무언가를 더 두런두런 나눴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이상하고 어색했다. 미안해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었는데. 나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유들유들 대화를 이어가기엔 너무 어설프고 미숙했다.
그냥 그 뒤로 봄은 내게 이상한 사람, 그러나 고마운 사람이 됐다. 그러지 않아도 됐을 일에 애쓴 사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 사람, 할 필요 없는 사과를 진중하게 내민 사람.
사랑은 이런 거라고 직접적으로 알려준 사람.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구나."
시편 14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