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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는 그해 끝물에 이렇게 말했다. 너를 가장 많이 만났다고. 희가 본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겪은 다른 사람들보다 물렁하고 물컹거리는, 꼭지 하나 잘못 떼면 왈칵 쏟아져 내릴 순두부처럼 여기지 않았을까. 순두부는 순두부답게, 가진 부드러움과 유연함으로 살아가며 대응해야 하는데 모 두부, 콩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맷돌이 되려고 했으니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는 여러 말들을, 말씀을, 자세와 제스처를 나눠주고 보여줬다. 기억의 시작은 카페다. 늦겨울, 초봄은 아직 멀고 먼 시간이었던 신년 초.
일월에 유독 여러 일이 있었다. 당시 임원단 내부에서 갈등이 터졌다. 샤샤와 이더가 싸웠다. 싸웠다는 말은 우습다. 샤샤가 갖고 있던 울분, 서러움, 답답함이 폭발하듯 일시적으로 터졌고, 이더를 포함해 자리에 있던 나와 다른 친구들은 일방적으로 날벼락 맞은 꼴이었으므로. 샤샤는 이더의 추천으로 들어온 사람으로, 해맑고 당찬 친구다. 그는 2018년도 임원단을 보고 '좋아 보여서' 같이 하고 싶다 했다. 그래서 이더의 추천에 선뜻 응했다고. 나는 그 마음을 알았다.
이더는 초록의 추천으로 몇 번이나 자리를 만들어 섭외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자주, 우스갯소리로 뒷방 늙은이는 빠져야지, 하곤 했는데, 나는 그 마음을 반만 알았다. 반은 알아서 샤샤를 비롯해 테디나 메이 같이 어린 친구들을 데려왔고, 반은 몰라서 그들과 이더 사이에서 갈팡질팡 헤맸다. 그가 원한 건 각 잡힌 군기였고, 내가 강력하고 권위 있게 회장 노릇을 해내길 바랐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강하게 휘어잡을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고, 그게 최고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할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나는 그 마음도 알았다. 그래서 되고 싶었으나 그마저도 반만 알았다. 내 마음의 나머지는 '왜 그래야 하지'라는 의문과 '애들이 상처받지 않음 좋겠는데' 라는 무의식 보호 작용으로 뒤죽박죽 엉켜 녹고 있었다.
물론 엉켜 녹은 마음은 단단하게 굳지 못했으므로, 나는 샤샤보다 이더의 마음과 말에 귀를 기울였고 동의했다. 샤샤의 마음,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끼고 싶다는 열망, 보호해 주길 바라는 소망은 알았으나 내가 더 원하고 바란 건 꼭대기에 서서 누구든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사람이었다. 흔히 말하는 철인이, 내 이상향이자 지향점이었다.
희는 그건 네가 아니라고 했다.
감이 빨강이고 초록이 초록이라면 너는 노랑이야. 노랑이 빨강이나 초록이 될 필요 없어. 노랑은 노랑답게, 노란색을 칠하면 되는 거야. 희의 말은 단호하고 담백했다. 이더와 샤샤의 일화를 들은 후였다. 나는 내가 대체 어떻게 해야 둘 사이를 풀어줄지 모르겠다 했다. 솔직히 샤샤가 왜 그러는지, 그 정도까지 대응해야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더 말대로 강하게 말해야 하는지,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며 풀어줘야 하는지, 알아서 하게 내버려둬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겠다고. 아마 더 이런저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희가 그 말을, 앞서 적은 말을 내게 건넨 것이겠지.
너는 너답게 하라고. 초록처럼 감처럼 억지로 굴지 말고.
이 말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게 생생하게 기억나는 문장이지만, 그때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두려움과 불안이 크고 깊었다. 불티와 쌀과 벌어진 트러블, 샤샤와 이더의 갈등, 성큼 다가온 동계 수련회 따위가 해일처럼 다가왔으므로, 나는 그 말, 나답게 굴라는 말만으론 안심할 수 없었다. 무엇이든 아주 날카롭고 강력한 해결책이 있길 소망했다.
물론 그런 건 늘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울면서, 불안을 키우면서, 외줄에 탄 심정으로 살았다. 아마 그 일들, 1월에 벌어진 여러 일들을 시작으로 나는 스스로 회장, 자립하고 자기결정하고 자유하게 의견을 말할 주체가 아닌 대리인, 중간 관리자, 낀 존재, 수동적 존재로 여기게 됐다.
그때마다 희는 나와 동행했다. <트렌스젠더 경험 이해하기> 책에 이런 문구가 있다: 동행하는 자세는, 한 사람이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 이해하고, 그의 현재 경험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상관없이 함께 여정을 계속하겠다는 의미다. (...) 그들이 홀로 그 여정을 감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결과에 따라 동행 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아주 서정적이거나 감성적으로 나를 대하진 않았다. 다만 희는 내 말을 들었고, 몸을 기울였고, 손을 내밀었으며, 생각을 나눠줬다. 여러 사람이 나를 답답해할 때마다, 스스로 울적해지고 화가 나고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건넸다.
마음을, 긍휼함이 깃든 마음을.
"디, 너한테 보여줄 게 있어. 지금 너한테 필요한 말씀 같아."
"뭔데요?"
"이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