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의미로 비워지는 건 아니라고 저번 주에 말했는데…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문득 든 깨달음인데 좋아하는 것도 중요한 것도 잘 떠오르지 않았어. 그냥 사는 느낌. 죽진 않고 죽으려 시도하지도 않아 살아지는 삶. 또 나는 나를 매끄럽고 흠결 없이 보이게끔 빚고 있었어. 틈새 하나 티끌 하나 보이지 않도록. 나는 예술 학교를 졸업했고, 시각디자인 과를 나왔는데, 거기선 늘 피드백을 받아. 내가 아니라 내 작업물 평가지만 내 손과 머리를 타고 나왔다는 점에서, 학생이라는 신분이라서, 교수님이 주는 가벼운 코멘트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섰지. 추상을 시각화하는 건 참 재밌는 작업이지만 남의 돈 받고 하는 프로젝트가 되는 순간 재미보단 부담이 앞서. 고객이, 사용자가 바라는 대로 해줘야 하니까. 그니까 아주 잘 만든 상품을 보여줘야 하는데, 이 "잘"은 의미가 천차만별이지만 트렌트 따라 감각적이고 세련되면서도 개성도 돋보여야 하는…쉽게 말해 '알잘딱깔센' 해야 하는 거지. 아무튼 이런 직업과 태도를 갖고, 뭐든 맡겠다 말했으니 잘 해야지, 하는 성격까지 타고난 사람이라 또 강박을 느꼈더라.
아 잘 보여야 해. 잘 해야 해. 잘 해내야 해. 괜찮아야 해.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80%까진 해내자. 조금만 더하면 괜찮지 않을까? 이 정도만 하면 안 되는데. 쉬면 안 되는데. 해야 하는데. 빠지면 안 되는데………
뭐 이런 거. 신기하지, 타인이 그러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고, 완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텐데 자신한테는 그러지 않는다는 게. 어쩌면 나는 아직도 나 자신만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그러면서 마음대로 휘두르고 윽박질러도 될) '것'이라서, 멀쩡하지 않으면 떨이로도 팔리지 않을 '상품'이라서 그러나 봐. 이렇게 잘 다듬어져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은연중 계속 되새기는 거지.
2019년에, 그러니까 교회 청년부 회장 하던 시절에 나는 주일 밤에 종종 윤슬(참고로 모든 이름은 가명으로 처리할 예정이야. 알아도 그러려니 하기!)과 차를 타고 우이동에 갔어. 419 탑 근처나 역 근처에 적당히 차를 세우고 안에서 대화를 나눴지. 그때 나는 몰랐지만 성격이 더러웠어. 날카롭고 예민했어. 모든 사람이 수군거리는 것 같았고…날 싫어하는 것 같았어. 윤슬은 눈치가 빠른 애야. 요새 왜 그러냐고 물어보고, 내 답을 듣더니 이렇게 말해줬어.
"너는 (어쩌고저쩌고 내 장점을 말해주고) 너무 너한테만 책임을 돌려. 다른 사람한테 그래도 돼. 왜 네가 다 잘못한 것처럼 굴어? 다른 사람한테도 그렇게 책임 좀 지워봐. 자꾸 네 탓만 하지 말고, 남 탓도 좀 해. 넌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고 사람인데 왜 스스로한테 모질게 굴어."
벌써 5년 전 일이라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직도 그때 해준 말이 떠올라. 단호했던 눈빛과 목소리가. 최근에 그때 말이 떠올랐어. 윤슬이 해준 말. 나는 아직도 나에게만 모질구나. 남에게 각박하고 모질어 봤자 바뀌지 않을 걸 알아서, 내게서 원인을 찾으면 보다 효율적으로 일이 끝날 걸 알아서, 나를 몰아세우고 갈라지고 깨진 틈을 메꾸려 필사적이었구나.
그러니까 이 글감을 쓰는 이유는…여전히 나를 위해서야. 너를 위해서 쓰기도 하지만, 아직도 '그냥' 사랑받는 게 어려운 나를 위해서. 잘리고 쪼개지고 거칠고 뭉툭하고 닳고 지저분한 내가, 그냥 사랑받는다는 감각은커녕 모두에게서 내몰린 느낌, 내쫓긴 느낌만 줄곧 받던 시절 받았던 응답을 다시 알려주고 싶어서.
네가 오지 않았으면 포기했을 거야.
절대 못 버텼을 거야.
그래서 믿을 수밖에 없어.
(…)
봐…하나님도 가끔 대답을 해준다.
『요나단의 목소리』 중에서
사실 이걸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 쓰면서도 모르겠고, 발행하면서도, 매듭 지으면서도 모를 것 같아. 그렇지만 어떤 말들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아. 언젠가 하게 될 말이라면, 언젠가 쓰게 될 글이라면 지금 말하고 쓰는 것도 괜찮을 거야. 언제 쓰든 나는 울 거고, 울면서 썩힌 것들을 다 토해낼 수 있을 테니까. 그렇지?
샬롬, 나의 친구야. 진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지만…정말로, 하나님은 대답해 준다. 가끔, 자주, 드물게, 종종, 이따금, 그러나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