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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벌써 3월 중순이 되어가는 월요일이네. 어느 날 D에게 시간이 점점 빨리 가는 것 같다고 했더니, 나이 들수록 더 빨라진다는 답을 들었어. 어린이들은 하루가 엄청 길게 느껴진다고 들었는데, 그건 그만큼 밀도 있게 살기 때문이래. 어른은 클수록 무뎌져서, 하루가 하루가 아닌 시간의 한 토막으로 여기게 되니까 빠르고 짧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어. 하루 자체는 긴데 돌아보면 언제 벌써 이렇게 됐나, 하잖아. 어제도 길 가는데 꽃이 피어서 벌써 꽃이 피었다고? 했거든.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하나둘 먹다 보면 점점 마음도 머리도 채워져 갈까, 비워져 갈까? 채워지기 때문에 무뎌지는 걸까, 비워지고 있어서 무뎌지는 걸까? 잘 모르겠지만 요새 나는 후자라고 생각 중이야. 나쁜 의미로 비워진다는 건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적응 했기 때문에, 어떤 길로 갈지 정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변동-방황이 필요하지 않다 느끼는 거 같아. 그러면서 조금씩 거추장스러운 것들, 군더더기를 빼는 중인 거지. 꼬리뼈처럼, 나이테처럼.
이런 마음은 언제부터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마음이 내가 해외 선교에 (올해는) 나가지 않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어. 사실 나는 여전히 너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기도, 감춰두고 싶기도 한 변덕이 있어. 이 마음, 생각도 굳이 말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나를 위해서도 말해놓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 그래야 내가 또 비슷한 기로에 섰을 때 흔들리지 않고 걸을 수 있을 테니까.
가고 싶은 데가 두 군데 있었어. 태국과 대만인데, 결론부터 얘기하면 선교에 뜻있어서 가고 싶은 건 아니었어. 작년부터 나는 해외 선교도 그렇고, '어딘가로' 가서 하는 것보다 '여기서' 하는 선교, 나의 언행이 지금 내겐 더 어울리지 않을까…하고 있었거든. 해외 선교라고 해도 달랑 한 번 갔다 온 건데 왜 그 뒤로 그런 열정 혹은 열망이 사라졌는지 잘 몰라. 나쁘지도 않았고 '좋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인데도. 그냥 단순하게, 먼 나라, 이국에서 누군가를 돕는 마음보단 지금 여기, 내 옆, 물리적으로 나와 맞닿은 누군가를 향해 손 뻗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더 커진 거겠지. 물론 이것도 곁다리 이유야. 난 늘 날 납득시키고 합리화시키기 위해 각종 살을 덧붙여. 안 그러면 너무 쪽팔려! 못 견디겠어!
진짜 핵심은 '일거리 늘리기 싫어서'야. 바쁘니까 하기가 싫어. 지금 맡은 것도 살짝 다 때려치고 싶은 마음, 굴속에 틀어박혀서 혼자 쉬고 싶은 마음이 아주 만만이야.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귀찮게 하지 마라 짜증 나니까".
이 마음 인정하는데 오래 걸렸어. 속을 세세히, 샅샅이 파헤쳐야 했는데 다른 이유가 제법 그럴듯 했거든. 위에서 말한 것 말고도 그 나라에 대한 마음 아니라 친목이 앞서는 것 같은 마음도 있었고, 1년은 열심히 해야지 결심한 기획단 일에도 허술해질 것 같아 미안했고…여러 가지가 있지만 본질이, 핵심이 너무 허접하고 이기적이라 민망해서 발견하고도 정말 그렇다,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어. 전에도 말한 것 같지만 난 늘 멋져 보이고 싶은 욕심이 커서…안팎으로 간지나는 사람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거대해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커서 매번 스트레스받고 좌절하는 사람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