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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너는 엠비티아이가 뭐야? 나는 테스트했을 땐 인프제(INFJ)로 나왔는데, 올해 들어선 사실 인티제(INTJ)라는 걸 깨달았지 뭐야. 물론 내가 인티제라고 했을 때 놀라는 친구도 있었고, 그럴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었어. 아예 아이(I)가 아니라 이(E) 아니냐고 물어본 친구도, 에스(S)나 피(P) 아니냐고 물어본 사람도 제법 있었지. 나는 사실 모두에게 나를 전부 오픈하지 않기 때문에, 분위기와 상황에 맞춰 말하고 반응하기 때문에 나오는 질문과 응답이라고 생각해. 꼭 누군가와 있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야. 혼자 어디든 쏘다니는 걸 좋아하면서도 집에 있는 건 안 좋아하고, 훈훈한 장면을 보면서 세상과 사람은 아직 아름답구나 하다가 트위터 글 하나 읽고 인류는 왜 멸망하지 않았을까요? 하는 등 한결같기는커녕 자기모순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이거든. 내가 나를 '얼레벌레'한 사람이라고 가끔 얘기하는 건 이런 일환이지. 외향적이다가 내향적이다가, 통제적이다가 충동적이다가, 직관적으로 굴다가 논리적으로 행동해 버리는 경우가 쉴 새 없이 일어나.
예전엔, 그리고 상태가 안 좋을 땐 이런 내가 싫었어. 한결같고 싶은데 그러질 못해서. 남이 보는 나는 어떨지 몰라도 내가 보는 나는 도통 무언가에 마음을 붙이지 못해서 자꾸 이리저리 부유하는 느낌이었거든. 둥둥 떠다니다 보니까 확고한, 단단한 사람이 아니라 환경에 따라 그냥 맞추는 이방인 같은 느낌이 강했어.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어디든 적응할 수 있지만 어디든 부적응할 수 있는...나라는 존재, 자아가 견고하지 않고 조각조각 찢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아. 부캐보단 페르소나가 여러 개라서, 그 모든 게 나지만 내가 아닌 거지. 어떤 모임에서는 A로, 여기선 B, 저기선 C...이렇게 말이야. 보통 공과 사를 구분한다고 하잖아. 나는 사私도 여럿으로 나눠서 살아가는 거야. 그게 당연하다 여기면서도 일관적인 사람을 부러워했어. 어디서든 줏대 있게 사는 사람들 있잖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사람들. 나는 갈기갈기 찢어서 살아가다 보니까 어디든 소속감이나 유대감 느끼기가 어렵더라고. 좋아하다가, 가까워지면 답답해져서 도망치고 멀찍이서 바라보면서 부러워하고...돌아가기엔 염치가 없으니까 영원한 건 없다고 스스로 속삭이면서 사라진 적도 제법 있었어. 꼭 포도 못 따먹으니까 저건 신 포도야, 하던 여우처럼 말야.
근데 이 편지를 써야겠다 마음먹으면서, 소재를 생각하고 글감을 모으면서, 그러니까 나에 대해 돌아보면서, 깨닫는 지점들이 있었어. 내 안엔 내가 너무나도 많고, 많아지겠지만, 하나는 변하지 않겠구나, 하는 지점들이.
나는 계속 그리스도인일 거야. 그건 확실해.
D였다가 김온유였다가, 그밖에 또 다른 이름과 필명과 예명과 익명으로 살아가겠지만, 직장인이다가 백수였다가, 카페 알바생이다가 또 다른 무언가가 되겠지만, 한껏 감성적이다가 로봇인가 싶을 정도로 차가워질 수도, 사람이 너무 좋아서 하루에 두 탕 세 탕 약속 잡고 만나다가 다 싫어서 냅다 도망칠 수도 있겠지만, 한 달 여행 일정을 날마다 잡고 어디를 몇 시에 갈지 정할 정도의 통제광 계획형 인간이었다가 그 일정 다 취소하고 냅다 분위기 좋아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서 두세 시간 앉아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 본질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야. 어디에 있든 어떻게 살아가든, 사랑받는 사람이고 사랑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인 거야, 나는. 그게 내 정체성이고, 다만 물결 같이 살아가는 사람으로 지어진 거야.
물결은 어느 곳을 흐르든 물결이라고 하잖아. 그렇게 흐르는 모양으로 어디든 흘러가잖아. 그냥 그 모양이 변화할 뿐이지. 누군가는 숲이고 땅이고 바람이고 별이고 달 같은 것처럼, 나는 그런 성질을 띠고 태어난 것뿐이야. 잔뜩 모순적인 형태로, 갈라져 보이지만, 실제로도 그렇지만 사실 흐르는 그 자체인 사람으로.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 달라서 아름다운 거겠지. 타블로(내 동년배들 다 알 것 같지만 에픽하이 리더...구구절절 설명 넣는 이유 묻지 마렴)가 쓴 소설에 이런 문구가 나와. "우린 저마다 다르고 또 달라요. 그래서 조금씩 다른 조각들을 맞춰가고 있는 거예요." 수천 개의 태양만 존재하면 살 수 없겠지. 수천 개의 숲은 숲이란 단어가 나올 수도 없었겠지. 숲이 있고 물결이 흐르고, 빛이 반짝이고 어둠이 내려앉는 덕분에 모든 게 같이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 맨 처음에 인용한 블로그 글 전문이 이거야: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누구든 한 번쯤 느껴봤을 법한 욕망 그런 것들이 내 속에 잔뜩 있었을 때가 있었다. 완벽히 이뤄지지는 않았는데 사람과 사람, 세계와 세계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무엇보다 한국에서의 나도, 여기서의 나도 결국 나라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니까 나는 물결로 살아갈게. 알 수 없지만 흘러가볼게, 그게 나니까. 결국 내가 다다를 곳은 아픔도 슬픔도 없는 그 땅이라는 걸 아니까. 너는 너대로, 너답게 살아가줘. 언젠가의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우리 각자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건 잊지 말고. 미래엔 영원히 아름다운 곳에서 만날 거라는 걸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