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Place New (15)
D가 D에게 #27 Some Place New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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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네가 겪고 있는 불안함, 불편함, 불확실한 느낌이
결코 나쁜 게 아니야.
오히려 그 감정이 너의 성장점이 되어줄 거야.
『언어가 삶이 될 때』, 김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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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한주 또 어떻게 보냈어? 나는 일과 일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봄 수련회를 다녀왔어. 내게 그 시공간은 어떤 영적인 뜨거움, 강렬한 체험을 겪은 곳이 아니라 분주함을 가로지른 단순의 쉼표였어. 감사한 게 있냐는 물음에도 그렇게 적었어. 삼시세끼 밥 줘서, 넉넉히 잘 수 있어서,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고. 가장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상이 내겐 많이 비어 있었거든. 너는 어땠니? 너도 나처럼 바쁘다 바빠 현대인의 삶을 살아내느라 단순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을까, 단조로워 공허할 지경에 이르러 무언가 짜릿한 사건이 벌어지길 내심 바라고 있었을까. 무엇이 됐든 너무 극단으로 치닫지 않은 시간을 살고 있길 바라. 부드럽게 흘러가는 선율처럼 균형 잡힌 시간과 공간을 살았길 바라며. 또 시작하는 한 주도 그렇게 아름다운 화음으로 엮어지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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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는 반가울 지경이었어. 입국할 땐 통과 못 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출국 직전 그곳은 왜 그렇게 익숙하던지. 한 번 왔다고 낯선 곳이 친숙해진 건지, 온갖 난리를 겪은 통에 변함없는 장소가 주는 안정감이 있던 건지 잘은 모르겠어.
나는 여기서 서른한 시간을 머물러야 해서 미리 숙소를 잡아뒀어. 여덟 시간 정도면 전처럼 느긋하게 관광하고 돌아오면 됐을 텐데, 내가 아무리 짠내 투어리스트라고 해도 하루가 꼬박 넘는 시간을 공항에서 버티긴 아니다 싶었거든. 공항이 친절하게 제공해 주는 공짜 와이파이를 받아 어떻게 ‘시내’로 가야 하는지 찾아봤어. 시스템은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노선은 복잡하고 영어가 서툰 초짜 여행객이 무식하게 나가기엔 피곤한 짓이니까(물론 무식하게 뉴욕 여행했으니 할 말이 없긴 한데). 클리퍼 카드(교통 카드)로 나가서, 원 데이 패스를 앱으로 끊어서 결제하면 된대. 음, 여기도 나쁘지 않은 디지털 나라군, 하고 말대로 나갔지. 버스도 제시간에 와서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타는데 내 게 안 찍히는 거야. 난 분명 샀는데. 결제 완료 표시도 떴는데! 황당하고 초조한데 무임승차는 안 되고, 다른 승객들이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어서 내렸지. 캐리어에 배낭까지 매단 채, 바깥으로 나온 바람에 느릿느릿 이어지는 와이파이로 겨우 정보를 찾은 결과 답을 알 수 있었어: 잘못 삼. 샌프란시스코는 한 ‘도시’ 지명이었던 거야. 그니까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산호세, 샌프란-어쩌고…이런 거였지. 내가 갈 곳이 샌프란-어쩌고(기억도 안 나)였는데 샌프란-시스코라는, 다른 도시행 티켓 사서 당당하게 승차하려던 거였고.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샌프란시스코 공항은 정말 휑한 곳에 있어. 나가면 건조한 바람이 불고, 뚜렷하게 존재감을 과시하는 태양이 마찬가지로 뚜렷하고 강한 빛을 내뿜으며 대지를 뒤덮고 있지. 11월 중순이니까 덥진 않지만 서늘하고 마른 공기가 물씬 느껴질 지경이야. 광활한 대지 너머로 보이는 건 널찍한 도로고, 도로 너머로는 낮은 산이 보였어. 황야를 개척한 게 맞구나, 싶게 만드는 공간이야. 차들만 세차게 지나가고, 내가 타고 싶던 버스도 무심하게 갈 길 찾아 가고 있었지. 내가 또 여기서 이상한 효율성을 발휘했어. 효율이 아니라 광기 같아. 무식한 독기. 어쩌면 서른한 시간을 공항에서 보내는 게 나았을 수도 있는…그렇지만 난 숙소를 예약했고, 어디든 이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쉬고 싶었기 때문에 지도를 열었지. 숙소까지 걸어서 한 시간이 걸린대. 걷기로 했어. 컨디션이 말도 안 되게 이상했기 때문에 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해. 잠을 못 잤고(인천으로 돌아갈 때도 잠이 안 왔는데, 긴장해서 종일 각성 상태로 있었던 것 같아), 하루만 버티면 됐고, 체력이 아주 바닥난 편은 아니니까, 또 돌아가서 돈 쓰느니 걷는 게 낫지 않을까? 샌프란 구경도 하고. 누가 이런 짓을 하겠어, 공항을 돌아 걸을 미친 생각을 누가!
내가 했지…하여튼 이상한 체력(알지, 정말 이상하게 힘과 정신이 솟구치고 맑을 때…꺼지기 직전 촛불 같은)으로 걸었어. 각 항공사 건물도 보고 오밀조밀 예쁘게 모아둔 꽃밭도 보고,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일까 공항 직원을 위해 세운 걸까 궁금한, 길가에 조그맣게 자리잡은 간이 커피숍도 보고, 황야였을 게 분명한데 왜 있는지 모를 언덕도 올라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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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걸으면서 좋았다. 즐겁고 기뻤어. 솟구쳤다 꺼진 언덕 가까운 산을 보며, 사이사이 누군가 분명 애정담아 가꿨을 화단과 불쑥 솟아오른 나무와 덤불을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위해 세워뒀으리라 추측되는 고운 장식품과 정원을 보며, 알록달록 색칠한 지붕을 보며, 버스를 탔다면 몰랐을 경치의 아주 소소한 장면들을 낱낱이 눈에 담을 수 있었거든. 다시 하라 그러면 안 하겠지만 그렇게 걸으면서 눈과 머리, 귀와 발에 스며든 풍경은 참 좋았어. 또 웃으면서 야 나 이런 적 있었어, 하고 너에게 말해줄 에피소드도 쌓고 말이야. 그땐 정말 스스로 어이없는데 가면 들려줄 시트콤 에피소드가 하나 더 생겼군, 생각하기도 했거든. 어떤 관점으로 보냐에 따라 많은 게 참 다르게 보이지 않니. 내겐 그래서 그 한 시간이 짜증 나고 피곤한 길이 아니라, 주민들만 알 법한 사소한 풍경을 보여준 새로운 여정이었어.
숙소마저도 이름이 바뀌어선 코앞에서 똑같은 곳을 세 번인가 네 번 빙빙 도는, 썩 유쾌하지 못한 경험을 했지만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안락함이 마음을 녹여주더라고. 로비 특유의 분위기 있잖아. 에어비앤비와 다른, 게으르게 느껴질 정도의 느긋함. 커피 한 잔 뽑아 마시고, 짐을 미리 맡기고, 캘리포니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인앤아웃을 찾아 떠났지.
온갖 햄버거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먹었는데 말야, 나는 파이브가이즈가 제일 맛있었단다. 그건 나 혼자 먹은 게 아니라 그런 거 같기도 해. 동일한 맛도 어떤 시간인지, 누구랑 함께했는지 따라 다르잖아. 그래도 인앤아웃도 맛있었어.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여유롭게 먹는 시간이라 그런지 몰라도 말이야. 상품 사진 찍듯 온갖 구도로 사진 찍은 걸 제외하면 큰일이 없었어. (이제는) 따사롭게 느껴지는 햇살, 하염없이 푸를 거라 말해주는 듯한 청명한 하늘,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이 전부였으니까.
그들도 확실히 그 환경, 따뜻하고 매끄러운 빛과 공기에 감싸인 덕분에 한층 더 느긋하고 순한 게 아닐까 해. 일반화할 순 없지만 뉴욕과 다르게 조금 더 사람 대 사람으로 보는 느낌이 컸거든. 어떤 하루를 보냈냐 물어본 슈퍼 점원, 등교하는 학생에게 살갑게 인사하고 장애인 할머니와 안부를 나누며 휠체어가 안전히 자리 잡을 때까지 돕고 기다리는 버스 기사와 사람들, 뉴스 봤는데 괜찮냐 물어보던 호텔 프론트맨까지 모두. 그런 것들, 전혀 영향을 안 끼칠 거라 생각하고 쉬이 넘어갈 수도 있을 자잘한 것들은 사실 우리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구나 싶어. 조금 더 일찍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자연을 이리 무참히 썰고 베진 않았겠지, 하는 생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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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은 이게 다야. 물론 거기서 좋은 것만 본 건 아니야. 시내 어디로 나갔다가 몇 개 도로를 점령한 노숙자 텐트를 봤고,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을 목격하기도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뭐라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그냥 모두가 선망하는 곳에서도 어떤 이들은 철저히 소외된 채 하루하루 겨우 살고 있구나, 이렇게 외면하는 이유는 뭘까, 하는 정도? 언젠간 이런 목격한 장면, 나 역시 알고 있지만 무심히 지나치고 있던 장면과 사실을 조금 더 깊게 직면해서 정제된 언어로 말할 날이 오겠지. 나는 이제 그런 삶, 지나치지 않고 멈추는 삶에 조금 더 가까이 들어가기로 결심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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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고 있어. 때늦은 추위도. 감기 조심해. 여행기 다 쓰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어째 한 꼭지 마무리한 정도, 그러니까 그냥 다 썼다, 이런 담담한 느낌만 드네. 모든 여행기를 다 마무리 지어야만 후련할지도 모르겠다. 그땐 또 얼마나 숱한 에피소드와 느낌을 네게 전하고 있을까? 또 어떤 이야기와 감상과 생각을, 과거와 현재를 말하고 있을까? 뭐가 됐든 멈추지 않고 말할게. 네게 유일할 순 없지만 궤적을 함께할 화자로써. 평안한 한 주 보내. 다음 주에 보자. 샬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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