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Place New (14)
D가 D에게 #26 Some Place New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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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네가 겪고 있는 불안함, 불편함, 불확실한 느낌이
결코 나쁜 게 아니야.
오히려 그 감정이 너의 성장점이 되어줄 거야.
『언어가 삶이 될 때』, 김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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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이주 만에 보네! 앞으로 남들한테만 건강 어쩌고 얘기 않고 나도 식물처럼 잘 돌봐주도록 할게. 날이 자주 우중충하고 흐린 데다가 환절기까지 겹쳐서 컨디션이 나빠지거나 안 좋아진 친구들도 있겠지? 나는 '난 런더너다…' 하고 자기합리화하면서 흐린 날씨를 흐린 눈으로 쳐다보는 중이야. 너희도 스스로 식물처럼 아기처럼 잘 아껴주고 가꿔줘. 해가 뜨기 직전 가장 어두운 새벽을 서광이라고 한대. 우리는 봄이 오기 전 서광을 지나고 있는 셈일 거야. 곧 불쑥 나타날 따뜻한 계절을 기대하며, 얼렁뚱땅 뉴욕 여행기 마지막(일 거라 믿으며) 얘기를 들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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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한 점이 있다면, 숙소와 지하철역이 5분 거리였다는 거야. 주차장 하나 넘어가면 바로 지하철 승강장이 나오는데, 여기가 또 종착역이었거든. 넓게 트인 땅에 승강장도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굳이 짚자면 지하철 아니고 지상철이라 부르는 게 맞을 거야. 아무튼 거기로, 거대한 캐리어와 배낭을 끌고 열심히 걸었어. 정말 짧은 거리인데도 황량하고 어두워서 굉장히 오래 걸린 느낌이야. 불빛도 없고 찬 바람만 무식하게 불어서 이제라도 택시를 부르는 게 맞지 않나,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지.
물론 내가 그 생각 정리하기도 전에 입구가 나왔어. 표 넣는 입구가 우리처럼 가로로 난간이 서있는 게 아니라 세로로 연결되어 있거든? 이게 근데 사람은 들어가지는데 캐리어가 안 들어가는 거야. 멱살 잡듯 가방을 밀어 넣고 있는데, 승무원분이 날 불러. 반쯤 맛이 간 채 왜요? 했더니 그냥 이리로 오라면서 손짓하는 거야. 종점이라고 했잖아. 정식 출입구(표 넣고 들어가는)가 아니라 버스가 지나가는 대로와 맞물린 출입구가 있거든. 그러니까 사실 사람들이 돈 안 내고 그쪽으로 가는데…양심에 찔려서 안 썼거든. 거기로 오라는 거야. 민망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데, 너무 고맙더라. 물론 그 분은 본분에 충실한 걸 수 있지만, 나는 변수-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잖아. 특히나 그 막막한 새벽에, 눈뜨고 있기도 피곤한 시간일 텐데, 찰나에 불과하지만 신경 써줬다는 게 정말 감사했어.
배려 덕분에 지하철에 타선 바로 핸드폰을 확인했지. 유심 빼느라 생쇼한 날부터 사흘 동안 내 본래 유심을 쓰는데, 그때도 돈 아낀다는 마음과 데이터 쓸 일이 그렇게 많을까, 하는 안일한 짐작이 합쳐져 사용한 게 1GB 로밍 요금제였어. 이건 사흘 동안 1기가 쓰는 거야. 이 말인즉슨 와이파이 없는 공간(거의 모든 곳)에서는 계산하며 써야 한다는 뜻이지…바로 그래서 전날, 아직 데이터 부자였던 시절에 루트를 찾아놨어. 한 화면에 경로가 다 안 담기니까 여럿 저장해놨지. 돌이켜보면 쓸 땐 써야 하는 것 같아. 모든 면에서 아끼는 건 오히려 덜 지혜롭다는 생각.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서 펜실베니아 역에 가서 뉴왁 국제공항행 기차를 타고 공항 직행 에어 트레인을 타면 끝나는, 말로 하면 아주 간단한 여정이었지. 지하철까진 큰 문제가 없었어. 갑자기 총 든 괴한이 나타나거나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거나 공사나 파업 때문에 지하철이 멈춘다거나 하는, 전날 내 신경을 곤두세웠던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지. 안심해서 살짝 졸면서 갔어. 이대로 기차 타면 되겠구나, 하고. 조금 늘어졌던 마음과 신경이 다시 바싹 조여진 건, 팬 스테이션-기차역 있는 곳-에 내려 밖으로 나온 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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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는 정문으로 들어가라고 아주 선명한 빨간 화살표로 안내해 주는데, 정문이 안 열리는 거야. 밀어도 당겨도 꿈쩍을 안 해. 그때 또 살짝 멘붕이 왔지. 시간을 넉넉하게 잡았다 해도 지하철과 기차는 배차 간격이 다르니까, 얘 놓치면 이후 오는 건 빨라봤자 삼십 분인가, 한 시간 후였거든. 해라도 뜨고 있다면 조금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을 거고, 카페에 앉아있는 대안을 선택해 봤을 수도 있겠지만 새벽이 너무 길더라. 건물을 빙글빙글 돌았어. 각종 문을 밀고 당겼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너무 춥고 캄캄했단 감각만 떠올라. 안쪽에 막 불 켜진 게 보이는데, 대체 이 인간들은 어디로 들어간 거야, 하고 부글부글 끓던 속이랑.
물어봐서 들어갔나, 누가 들어가는 거 보고 냅다 뛰다시피 걸어서 들어갔나, 전자가 더 강력한 것 같아. 들어가고 나서도 또 물어봤어. 우리도 터미널은 넓다 못해 거대하잖아. 나는 심지어 정문 아니라 옆문, 정말 직원용 출입구로 들어간 거니까 길을 더 모르겠더라. 빙빙 꼬인 복도와 이제 막 열기 시작하거나 준비 중인 가게들을 스치고 지나쳐서 겨우 진짜 '역'에 도착했어. 거기서도 어떤 사람들은 대기실에 앉아있고, 어떤 사람들은 서성거리는 거야. 죽겠어서 대기실 들어가려고 하니까 표부터 사라고 정중히(라고 쓰고 차갑게라고 읽는다) 막더군. 뭐 어떡해, 네에, 힘없이 대답하고 힘없이 표 사고(그나마 기차 티켓은 버스 티켓보다 쉽게 구매할 수 있었어) 앉았지.
그때서야 사람과 공간이 눈에 들어왔어. 나처럼 힘없이 초췌한 얼굴로 앉은 사람들, 큰 가방을 둔 채 묵묵히 음악 듣는 아저씨, 계속 출발 시각이 표시된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 조용히 떠드는 가족,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는 여자와 깊게 잠든 채 소란을 흘려보내는 사람…대기실도 삭막하고 건조하긴 마찬가지였거든. 근데 거의 나 홀로 한 시간 넘게 달려와서 작게나마 복작거리는 분위기에 앉아있자니 희한하게 긴장이 풀리더라. 이 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까, 저 사람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등. 타지에 있으면 아주 작고 사소한 것도 감정과 감각 변화에 엄청난 촉매제가 되는 거 같아.
또 사족이지만, 나는 공감을 정말 못해. 오늘 들었던 말 하나가 인상 깊었는데, "너는 상상을 총동원해서 공감한 거였어", 였거든. 내가 직/간접적으로 겪지 않으면 이해는커녕 납득이 안 되는 사람인데, 그래서 하나님이 자꾸 나를 온갖 상황에 던지시나 싶었다. 내겐 너무 스트레스고 불안과 두려움이며 해일 앞에 냅다 던져진 것 같은 광막함이 들 때도 많은데, 바로 그래서 사람과 사람 마음을 알고 느끼고 깨닫게 돼. 아, 이랬겠구나. 이럴 때 이래서, 그런 말과 행동을 하고 반응한 거구나. 내가 무서워 움츠러들기만 했다면 절대 몰랐을 감정과 마음들. 새로움과 낯섦, 빈 공간에 대한 불안이 아주 가시진 않겠지만 이제 조금은 더 기대와 설렘으로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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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공항 도착까지는 순조로웠어. 사실, 아주 큰 걸림돌이 있던 시간은 아니야. 내가 너무 긴장했고 무서워했던 거지. (기차 안에서도 뉴왁 공항과 뉴왁 시티 두 역이 나란히 붙어있는 바람에 내내 듣기평가 하고 있던 사실은 말하지 않을게) 공항에 딱 도착하니까 기분이 이상했어. 뿌듯하기도, 안심하기도, 어떻게 큰 사고 없이 오긴 왔구나 하기도 하고…기쁨과 자랑스러움? 성취감 따위가 크고 작게 엉켜서 파도처럼 휩쓸고 떠났어. 파노라마처럼 지난밤과 새벽이 떠오르기도 했고.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에피소드가 격렬한, 드라마틱한 과정일 필욘 없어. 이 심심하고 따분한 일상이 소중한지 알기 위해 필요하지만, 매번 그랬다간 여러 의미로 맛이 갈 거야.
수속 마치고 의자에 앉아서 미리 사둔 과일(반값 세일 코코넛 슬라이스와 베리)을 먹는데, 맛이 정말 더럽게 없는 거야. 섬유질도 포만감도 채워야 해! 라는 의무감으로 꾸역꾸역 먹다가 결국 버리고, 엄마랑 통화하다 보니까 해가 떠오르더라고.
그건 정말 아름다웠어. 꼭 내가 영화 속 한 장면, 엔딩 씬에 머문 느낌이었지. 깨끗한 흰색 공간을 서서히 물들인 새파란 하늘과 오렌지 빛 태양. 가만히 보다가 깨달았어.
아, 진짜 끝이구나. 이제 정말 집에 가는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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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제 정말 뉴욕 여행기가 끝났다. 이렇게 오래, 길게 쓸 거라고 생각은 안 했는데 말이야…길어도 여덟, 정말 길면 열 편? 생각했거든. 어쩌면 편지 보낸단 명목하에 내 개인 기록을 남기겠다는 사적 욕심이 더 컸을지 모르겠지만, 이 사적 욕심이 지금 편지를 읽는 너에게 소소하게나마 즐거움으로 간직되면 좋겠어.
다음 주에는 진짜(!) 마지막인 샌프란시스코 경유(서른한 시간을 버텨야 했답니다) 코스를 들려주고 끝낼게. 따뜻하고 다정한 월요일 보내. 샬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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