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Place New (12)
D가 D에게 #22 Some Place New (12) |
|
|
지금 네가 겪고 있는 불안함, 불편함, 불확실한 느낌이
결코 나쁜 게 아니야.
오히려 그 감정이 너의 성장점이 되어줄 거야.
『언어가 삶이 될 때』, 김미소
|
|
|
-
안녕, 오늘부터 한 주 동안 또 무시무시한 추위가 온다더라. -14도라는데 잘 차려입고, 먹고, 마시고, 자도록 해. 어째 매번 건강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한 주 만이라고 해도 당장 내일 일도 알 수 없어서 자꾸 물어보게 돼. 하루가 짧다 느끼기도 하지만 사실 그 스물네 시간은 상당히 길잖아. 그 시간이 쌓인 일주일은 더더욱 길고. 그러니까.
내 하루는 짧고 길다. 한 주도 그래. 그 굵고 짧은 흐름이 좋아. 연말에 회사를 그만두고 카페로 돌아가서 여러 일을 병행하고 있는데 전엔 몰랐던 그 자유가 너무 감사하고 기쁘더라. 작은 공간에 갇혀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이제 이 공간은 내가 가꾸고 돌볼 곳인 거야. 그래, 꼭 정원처럼. 이런 걸 보면 신기하지 않아? 어떤 경험을 겪고 마주했느냐에 따라 똑같은 곳으로 돌아가거나 동일한 경험을 다시 해도 완전히 다르게 느끼고 인식하잖아.
다른 D와 얘기했는데, '소거법'이 정말 맞는 말이야. 안 맞는 생활을 해보니까 안 거지. 아 나는 이러저러한 걸 싫어하고 못 견디는구나. 그 친구가 '오히려 더 명확해지는 것 같고, 싫어하는 걸 발견했을 때 마음 정리가 더 빠르게 된다' 했는데 내가 얼마나 동감했는지. 아무튼 이런저런 얘기는 나중에 또 나누자. 여행 얘기를 일단락하고 말이야. 그때면 또 쌓아둔 이야기에도 시간이 물들어 여러 색으로 희석된 감정과 생각을, 느낌과 마음을 단정하게 나눌 수 있을 거야.
|
|
|
유니온 스퀘어는 남쪽에 치우친 곳이고, 주말마다 재래시장이 열려. 우리나라로 치면 주말장이라고 해야겠다. 처음엔 그게 열리는 줄 모르고, 발 닿는 대로 가면서 보이는 공원은 무작정 가본 거라 불쑥 들어간 거였어. 초록이 질박하게 심긴 곳에 나직나직 세워진 연둣빛 테이블과 의자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지. 가족과 함께 도시락을 먹고, 통기타를 연주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 친구를 기다리며 조용히 자신의 음악 세계에 심취한 사람・・・공원 한쪽은 그렇게 자연을 벗 삼는 사람들이 있었고, 중앙은 설핏한 군중으로 차 있었어.
여기가 중앙 구역이 있고, 크게 두 갈래의 출입구가 있거든? 공원에 출입구라고 하니까 말이 이상한데, 앞에 얘기한 대로 양쪽으로 뚫린 대로와 광장이 있다고 보면 돼. 거기에 이제 시장이 열리는 거고. 난 시장 구경도 진짜 정말 좋아해. 볼 것도 다양하고 활기차잖아.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구경만 해도 시간이 빨리 가서, 가끔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하면 꼭 그런 데 구경 갔어. 이런 사람인데 이국 재래시장? 참을 수 없다. 분명 다른 걸 하려고 했던 거 같은데 때려치고 구경하러 갔지. 어차피 난 여행자고 여행자의 목적과 계획은 여행지를 구경하는 게 제1순위니까. 다른 게 뭐가 중요하겠니!
|
|
|
시장은 풍요롭고, 들뜬 열기로 가득했어. 다보록다보록한 과일과 채소, 빵과 술, 꽃 따위가 한가득했지. 작고 큰 사과는 빨갛고 노란 색과 연둣빛으로 두껍게 짜인 궤짝에 듬뿍 들어 있었고, 내 몸뚱아리 절반은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꽃대 묶음은 그만큼 옆으로 널찍하게 핀 여러 꽃 뭉치와 함께 펼쳐져 있었어. 봄바람이라 착각할 정도로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나울나울하는데 보기 참 좋더라. 아름답고.
이미 입소문 탄 게 분명한 한 빵집은 빵 사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어. 장발장이 훔쳤던 빵과 비슷한 크기를 가진 딱딱한 빵부터 샛노란 커스터드 크림 넣고 구운 크림빵, 각종 씨앗을 다닥다닥 붙인 채 쌓여있는 베이글과 솜씨 좋게 매끄러이 바른 버터 덕분에 냄새 하나로도 배고프게 만드는 페스츄리까지・・・돈이 넉넉했다면 여러 가지 사서 맛봤을 테지만, 짠내 투어 중인 여행자는 고심하다가 페퍼로니와 올리브를 넉넉하게 위에 올려준 치아바타와 입자 굵은 설탕을 눈처럼 뿌려준 빵을 골랐어. 시장이 근데 진짜 좋아. 양도 많은데 가격이 싸! 내가 일주일 동안 샌드위치 만들어 먹었다고 했잖아. 가끔 한 조각에 1.5달러 하는 피자도 먹고, 하여튼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기억이 드물거든? 근데 여기서 그 빵떡들과 유기농 요거트(메이플 맛) 사는데 아주 저렴하게 샀어! 이래서 사람도 많았나 싶어. 맛있고, 크고, 싸면・・・제가 맨하탄 등지 주민이라면 꾸역꾸역 지하철 타고 와서 일주일 식료품을 쟁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한 번 더 갔어. 사과도 사고 빵도 사고, 라벤더 시럽(심부름이었음)도 사고・・・사람 많은 곳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그런 재래시장이나 플리마켓은 괜찮다? 꽉 막힌 공간이 아니라 그런가. 아니면 내 기준 적당한 인파라서 좋아했나 싶기도 하고・・・뭐가 됐든 가을 뙤약볕 쬐며 내리 걷고 구경한 시간은 또 다른 곳을 용기내 가게 해줄 원동력이 됐어. 용기와 체력이 적확한 말이야. 용기는・・・해가 서편으로 슬그머니 기울기 시작할지라도 새로운 곳을 가보겠다는 거고, 체력은 지치지 않고 쭉 걸을 수 있는 힘이지. |
|
|
메디슨 스퀘어는 유니온과 크기가 비슷해. 모양도 비슷하고. 여긴 근데 중앙에 큰 분수대가 있고, 거기까지 가는 길이 조금 더 정갈하니 잘 닦인 느낌이야. 유니온은 공원 외곽에서 사람들이 체스를 엄청 열심히 두고 있었는데, 여긴 사진처럼 아예 아마추어 악단이 와서 연주하거나 연주자가 단독으로 벤치에 앉아서 음악 하는 경우가 더 잦았어. 그러고 보니 뉴욕은 지하철 안에서도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노래 부르는 사람이 제법 있었는데, 단순히 돈벌이 수단인지 모두가 이 음악을 듣고 행복하면 좋겠단 마음도 섞여 있는지 궁금하네. 어떤 사람 앞에는 기부금 받는 용도의 통이 놓여 있었고, 어떤 연주자 앞에는 없었거든. 다시 없을 만남이라면 조금 용기를 내보는 것도 좋았을 텐데, 그런 용기 내는 게 더 어려울 때가 많아. 일단 낯선 이에게 다가가는 자체가・・・뭐, 이게 내 모습이긴 하지. 필요하다면 낯선 타자에게 말을 걸면 되는 거고.
사족이지만 D에게 나는 사람한테 관심이 없어서 걱정이라고 한 적 있거든. 뭐라고 하지, 굳이 신경 쓰지 않는다? 방관자니까 이게 과연 옳은 걸까 고민한 적이 종종 있다고 했는데, 억지로 그럴 필욘 없다는 말을 들었어. 너는 네 방식으로 사랑하면 되는 거라고. 그게 참 위로가 됐어. 나는 이런 방식과 이런 표현으로 사랑을 나누면 되는구나, 해서. 나다운 걸 발견해 나가는 길도 참 쉽진 않아. 그래도 '오히려 좋'은 마음으로 해나가야지.
메디슨 공원은 그 분수 물줄기 쏟아지는 거나, 다채로운 음악 연주나 다 좋은데 대마 냄새가 너무 나서 별로였어. 내가 그 말도 했니? 예쁜 아이스크림 트럭인 줄 알고 찍었는데 대마 트럭이라서 냅다 지웠다고(ㅎ). 쑥 태우는 냄새라서 이게 뭐지 했는데 다 대마 냄새라서 내가 얼마나 기겁했는지・・・이건 근데 도시 전반을 덮은 냄새라 뭐 어쩔 도리가 없더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다녔어. 그 냄새를 제외하면 여러 소품도 팔고 잠깐 구경하기 좋은 곳이니까 가면 방문해 봐.
모든 공원은 가면 재밌거든. 조금씩 다른 분위기와 사람 보는 재미가 쏠쏠해. 어디는 아주 평화롭고, 어디는 활기차고, 어디는 고즈넉하고・・・공간을 만들어내는 건 결국 거기 모인 존재들 아닐까 싶어. 무엇을 두고 내놓을지에 따라 똑같은 공원이라고 해도 아주 달라지니까. 나무가 다 같은 나무 아니고, 사람이 다 같은 사람 아닌 것처럼 공간은 그 저마다 다른 존재가 어우러져 특색을 내는 걸 거야.
어쩐지 길었던 공원 에피소드도 끝났다. 참, 고민했는데 워싱턴과 샬럿은 뺄 거야. 거긴 아는 분들 만나러 간 곳이라, 조금 더 사적이다 싶어서. 그러니까 나와 그 사람만 알고 싶은 이야기? 말로 하면 하겠지만 글은 남으니까. 두 편 정도 더 쓰면 이 길고 길었던 뉴욕도 얼추 마무리될 것 같아. 다음엔 또 어떤 얘기를 꺼낼지 모르겠지만, 남은 이야기들을 조금 더 잘 다듬어서 가져다줄게.
사랑과 소망으로 가득한 한 주 되길 바라며. 잃지도, 놓지도 않는 시간이길 바라며・・・샬롬! 다음 주에 보자.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