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Place New (8)
D가 D에게 #16 Some Place New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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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네가 겪고 있는 불안함, 불편함, 불확실한 느낌이
결코 나쁜 게 아니야.
오히려 그 감정이 너의 성장점이 되어줄 거야.
『언어가 삶이 될 때』, 김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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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이젠 정말 '완연한' 겨울이구나. 12월이잖아. 시간은 참 상대적이야. 소중할수록 빠르게 흘러가. 내가 그 시간에 정말 몰입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그럼 소중하지 않다고 느낀 시간도 귀하다고 여기면, 빠르게 흘러갈까? 문득 그런 질문이 드네. 아무튼 서두는 짧게 쓰겠다고 했으니 여기서 줄일게. 전날 야밤에 쓰는 거라 서론을 너무 길게 쓰면 안 된다는 직감도 들어서 그래. 한 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하루만 빼먹을까 말까, 도 고민했는데 내 사정은 내 사정이고 보내는 건 약속이니까. 더불어서 그 선택도 쉬운 길을 택하는 거란 생각이 들어서. 쓰면 쓸 수 있으니까. 내 멋대로 한계점 정하지 말자고 당장 저녁에도 얘기했으니 언행일치 자세 보여야지.
뉴욕에 돌아온 다음 날 아침엔 숙소를 옮겼어. 한인 타운에서 라티노 타운으로. 여긴 집이 다 짜 맞춘 것처럼 비슷한 모양인데 색이 참 알록달록해. 샌프란시스코 어디에도 이렇게 알록달록 예쁘게 모인 주거 구역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느낌이야. 평안하고…어쩌면 처음 에어비앤비에 들어섰을 때 나를 향해 보내준 환영 인사가 좋아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어. 내가 쓸 방에 환영해, 요한(영어 이름을 요한으로 했거든)! 하고 프린트한 종이가 붙어있고, 호스트는 수줍은 미소와 함께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줬는데 그게 신기하게도 좋았거든. 냉정하게 따지면 난 값을 치른 손님이니까 좋게 대하는 게 마땅하다,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난방이 되는지 안 되는지 알 수 없는 작은 라디에이터 하나, 싱글 침대와 책상 하나, 옷장 하나가 마련된 작은 방은 옆집이 보이는 창문이 하나 뚫려 있었지. 공동욕실과 거실, 주방을 쓰는데 감사하게도 다른 사람들과 시간대가 다르기도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편하게 쓸 수 있었어. 나는 내 공간 한 칸만 있으면 다른 건 크게 개의치 않는 사람이라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네. 그 주방에도 창이 하나 나 있는데, 이른 새벽에 나가면 이제 막 빛이 스며들기 시작한 공간이 좋았어. 어슴푸레한 사이로 떠오르는 아침 해. 고요히 커피 가루를 종이 필터에 넣고, 커피가 다 채워질 때까지 아침 식사 준비를 하며 나는 자잘한 소음과 검푸른 빛을 누릴 수 있었거든. 나 홀로. 여행하면 그렇잖아, 내가 아침에 절대 안 할-커피 내리기-것 같은 걸 가서 하는 거. 난 여행 가면 커피 내리기나 식사 준비도 그렇고, 산책도 하러 나가거든. 마트도 가고…그냥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아침이니까 더 그렇게 부지런히 움직이게 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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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마다 마트도 다양한 거 알아? 돈이 부족하니까 외식은 엄두도 안 나고, 마트 가서 일주일 치 먹을 거 장 보러 갔거든. 여긴 라틴계 사람들이 많이 먹는 식료품이 쫙 깔려 있었어. 기본적으로 어디든 다양한 종류의 과일과 거대한 빵이 놓여있는데, 거기에 자주 먹는 특이한 향신료나 소스, 치즈 같은 게 추가돼. 근데 여긴 희한하게 가격표가 나뉘어 있어서 엄청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몰라서 옆에 있던 할아버지한테 물어봤거든? 동네 주민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자기도 모르겠다고 해서 직원한테 가서 물어봤잖아. 왜냐면 그게 샐러드 팩이었는데 엄청 쌌거든. 근데 세일가 말고 정상가였나 뭐가 하나 더 붙어서 사람 심란하게 만들고 있었어. 모르고 룰루랄라 계산대 갔다가 타격 입을 바엔 먼저 물어보자, 결심한 거지. 짠내 투어의 긍정적 효과: 용기를 내게 함. 아무튼 세일하는 거 맞단 답 듣고 그 할아버지한테도 말해주고(그분도 이걸 유심히 보고 계시더라고) 행복하게 두 팩을 안았지. 양손 가득.
난 탄단지 비율도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맨날 하기 때문에 편의점 가서도 고민해. 간식 말고 식사를 편의점에서 사야 할 때 말이야. 그러니까 여기서도 당연히 엄청 고민하면서 돌아다녔지. 고민하고 고르고 내려놓고 집어 들고 들춰보다가 겨우 산 것들은 이런 거야; 수제 페타 치즈 1통, 샌드위치용 햄과 샐러드 두 팩, 납작한 호밀빵 8개입 묶음. 일주일 동안 두 끼씩 열네 번 먹어야 하니까 용량도 고려해서 샀지. 진짜 독기로 가득해서 일주일 내내 샌드위치만 먹어치웠던 기억이 나. 종종, 사실 자주 이상한 광기를 낼 때가 있어. 효율을 따지다 보니 이게 과연 진짜 더 효율적인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나한텐 효율적이었으니까 됐겠지……. 사실 먹을 것보다 중요한 건 흘러가는 모든 시공간이었으니까. 지나가는 사람들, 쌀쌀한 공기와 바람, 다닥다닥 붙은 좁고 넓은 다이너와 슈퍼, 가을과 겨울이 뒤섞인 빛의 변화 따위 말이야. 갈색으로 누렇게 물든 수국과 물들다 못해 바닥에 떨어지던 단풍, 잔디밭에 불쑥 튀어나온 청설모와 할로윈의 잔재가 남은 집들까지. 돌아다니다 귀가한 숙소에서 홀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밤과 새벽을 지새우던 시간도. 내겐 그게 귀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었으니까.
스타벅스에선 크리스마스 시즌을 내걸기 시작했는데, 그때 누가 커피 사면 시즌 리유저블 컵에 음료 준다고 해서 갔는데 거짓부렁(이거나 내가 난독했겠지)이라 슬픈 미소로 커피 받은 기억도 떠오르네. 그 와중에 선물도 사긴 샀어. 퀸즈에 일주일 머물다가 샬럿과 워싱턴 가면 만날 분들을 위해, 귀국하면 줄 사람들을 위해. 물론! 말했듯 넉넉하게 살 형편이 아니라 25주년 기념 리유저블 컵 세트 한 묶음 사서 일일이 나눠서 줬다. 내 것도 하나 빼놨는데 한 달 썼나, 어디서 잃어버렸어. 가방에 끼워 넣은 채 돌아다녔는데 집에 오니까 사라졌더라. 개짱나는데 어떡하겠니, 차라리 누가 들고 가서 잘 써줘라…하고 말았지 뭐. 아무튼 거기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참 좋았지. 가을 한낮이 건네다 준 따뜻한 빛살, 빛 받아 맑게 빛나는 무지개 글라스데코, 북적거리는 편안한 대화와 피아노로 연주되는 캐럴까지, 여행자라서 이렇게 세세한 하나하나에 마음이 즐겁고 평화로운 걸까, 생각하고 있었어. 뭐든 어여쁘고 아름답게,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건 쉬이 누릴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일까. 돌아가면 한동안 누리지 못할 걸 알기 때문에 그 흔한 바람과 햇볕마저도 새롭고 좋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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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여행자의, 방랑자의 마음으로 살고 싶어. 마음도 삶도 그랬으면 싶어. 몰랐는데 안정을 그렇게 바라지도 않더라고, 내가. 최근에 더 알게 된 것들이야. 일요일 저녁에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나눴어.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기 위해선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과 일단 부닥치는-뛰어드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그래야 맞지 않는 건 아니구나, 하고 벗어날 수 있으니까.
라티노 타운에서 일주일은 한 편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자질구레한 에피소드가 많았네. 조금 더 '환대'에 대해 새삼 느낀 계기도 못 나눴고…그건 또 다음 주에, 진득하게 써 내려가 볼게. 네 12월 첫째 주가 또, 평안과 기쁨, 따뜻함과 소망으로 채워지고 차오르는 시간이길 바라며. 샬롬, 사랑하는 친구야. 또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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