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Place New (10)
D가 D에게 #20 Some Place New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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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네가 겪고 있는 불안함, 불편함, 불확실한 느낌이
결코 나쁜 게 아니야.
오히려 그 감정이 너의 성장점이 되어줄 거야.
『언어가 삶이 될 때』, 김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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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새로운 한 해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아. 2024년이 네게 기쁨과 다정으로 가득하길 바라. 마주하는 시간과 공간 모두 새로운 기대감과 멋진 경험으로 반짝반짝 빛나길 바랄게. 한 가지 고백하자면 1월 1일에 원래 편지를 발행하려고 했거든? 근데 기절했어. 크리스마스 전부터 아팠는데(그래서 크리스마스가 잘 기억나지 않아. D랑 카페 갔다 바로 집 가서 잔 것 같은데 모르겠다), 그러고 이주 내내 골골거렸거든. 그 전 한 달을 몰아치듯 산 후유증이 퇴사하자마자 몰려왔던 게 분명해. 물론…마이너스 십이 도에 육박하는 한겨울에 마지막 산책이라며 커피 하나 덜렁 들고 나갔던 행동이 가장 큰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말이야. 아무튼, 25일은 크리스마스카드 보내는 컨셉으로 어찌저찌 보냈는데 1일은 송구영신 예배드리고 조금 살만해졌다고 카페 갔다가 새벽에 돌아갔거든. 5시니까 아침 아니고 새벽 맞지…가서 쓸 거란 결심은 새까맣게 잊고 잤어. 일어나니까 10시더라. 미안합니다. 앞으로는 애매하다 싶으면 미리 쓸게요. 어처구니없는 펑크 내지 않을게. 약속.
돌고 돌아 다시 뉴욕이구나. 오늘은 공원 얘기를 해줄게. 날이 너무 춥잖아. 추울수록 따뜻하고 보드라운 이야기와 음료를 곁들여야 해. 성냥팔이 소녀가 왜 성냥 들고 노란 불빛 켜진 집을 상상했겠어? 그런 따스함이, 상상일지라도, 아주 미약하게나마 확실한 온기를 가져다주기 때문 아니겠어? 그러니까 가을 한낮의 따사로움을 품은 공원들 얘기를 해볼게. 네 월요일이 우악스러운 한기에 짓눌리지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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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뉴욕은 따뜻했고 화창했어. 한 달 가까이 뉴욕에 살았는데, 흐린 날을 거의 못 본 거 같아. 사흘이나 나흘 정도 흐리고 비가 왔던가, 그러고 나머지 날은 사진처럼 맑고 쨍했어. 걸어 다니기 딱 좋은 날씨였지. 내가 산책 좋아한다고 말했니? 무작정 걷기 좋아해서, 뉴욕에서도 정처 없이 걸어 다녔어. 신발 두 켤레 가져갔는데 하나는 버렸을 정도로 한없이 걷고 또 걸었지. 목적 중심형 인간답게 최종 목적지는 정했어도, 거기까지 어떻게, 얼마나 갈지 정하는 건 내 선택이잖아. 나는 그 시간을 아주 기쁘고 가볍게 걷는 데 사용한 거야. 가면서 마주한 풍경은 이제 잘 기억나지 않지만 몇몇 장면들이 희끄무레하게 떠올라. 형광 연두색 입간판에 수줍게 묶어둔 알록달록한 풍선들. 거대한 활자를 꾹꾹 눌러 새겨둔 간판 아래 널찍한 바비큐 식당. 길고 굵은 철골로 하부를 지탱한 온갖 공사 건물들. 그 아래 무심하게,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과 틈새 없이 공간을 꽉 채운 새파란 하늘. 치아 모양 의자도 생각나고, 예쁜 아이스크림 트럭인 줄 알았더니 대마초 트럭이라 황급히 지웠던 산뜻한 연두색 트럭도 기억나. 거대한 빵을 꽉꽉 채운 유리 진열장과 음식 메뉴로만 통유리 창문 반을 채웠던 다이너도.
기억이란 건 참 신기하지 않아? 고심하다 보면 어느새 희끗한 이미지가 조금씩 선명해지거든. 최근 읽었던 책에서 그런 말을 봤어. "이야기와 기억은 상호 의존적이다. 분절된 현재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나는 과거를 드문드문일지라도 분명 기억하고 갖고 있는 사람이라서 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릴없이 할 수 있는 거겠지. 감사한 일이야. 네게 아주 오랫동안 지금과 연결된 과거를, 훗날과 연결될 오늘을 말해주고 싶으니까.
아무튼 맨 처음 간 공원은 브라이언트 공원bryant park이야. 뉴욕 거주하는 트위터리안이 자주 가는 곳이라며 사진을 종종 올려줬는데 되게 좋아 보이더라고. 근처에 유명한 카페(근데 한국에도 있더라) 있길래, 커피 사서 산책하면 완벽하겠군! 하고 룰루랄라 갔지. 진짜 좋긴 좋았어. 작아서 아쉬웠을 뿐이야. 더불어 겨울 축제 준비한다고 곳곳이 천막 상점으로 차버려서 더 좁아진 것도…하지만 그 축제 잘 만끽했으니 할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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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정문에 들어서면 분수가 있어. 소망이나 행운을 바라며 던진 동전이 오밀조밀 쌓인 돌 분수대야. 앞에는 청록색 의자와 테이블이 분수를 감상할 수 있게 배치되어 있고, 공원을 빙 둘러 그런 의자와 벤치가 여러 곳 설치되어 있었어. 운 좋게 분수대 바로 앞에 앉을 수 있었지. 따뜻한 카페 라떼 한 잔을 두고 가져온 책을 읽으며 앉아있는데 무슨 말을 하겠니? 그냥 '좋다'지. 활기차게 솟구쳤다 떨어지는 물줄기, 식사인지 간식인지 모를 빵과 커피를 먹고 마시며 수다 떠는 사람들, 사진 찍으러 다가온 관광객들, 그 모두가 한데 어우러진 풍경은 생기가 넘쳤어. 재미라는 단어를 여기 붙여도 될는지 모르겠는데 재밌기도 했고. 깔깔 웃으면서 서로를 찍어주기도 하고, 이해 못 할 외국어로 떠들면서 쉼 없이 먹고, 자리를 찾아 혹은 산책하며 빠르고 느리게 걷는 사람의 흐름 자체가 나한텐 재미로 다가오더라고. 끊임없이 흐르는 흐름은 늘 신선하잖아. 멈추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나한테 일절 관심 두지 않잖아. 그러니까 관찰도 편하게 할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거지.
유유자적 흐르는 흐름이 좋아. 과하게 흘러가지도 않고, 고여있지도 않은 그 잔잔하지만 분명한 흐름이.
한두 시간은 그렇게 앉아서 책 읽고, 느낀 점을 끼적였던 것 같아. 때때로 사진을 찍으며. 근데 햇볕이 환하게 비춰도 가을은 가을이라서 가만히 앉아있으면 춥더라. 게다가 난 한곳에 오래 있질 못하는 성격이라 미련 없이 자리 털고 주변을 돌아보러 떠났어. 공사하느라 분주하긴 해도, 이제 막 단풍이 들려 하는 가로수 사이는 제법 조용했어. 분수대 앞만 떠들썩했지 다른 곳은 한두 명만 공원을 통해 이동하거나 앉아있어서 적적하다 할 정도였지. 나는 그 고요가 좋았고. 구석구석, 사람 없는 공원에 들어선 작은 노천카페와 석조로 만들어진 거대한 레스토랑을 구경하고 자그맣게 세워진 회전목마도 쳐다봤지. 가늘고 꼿꼿하게 서 있는 나무 사이로 비죽 솟아오른 건물들도 종종 올려다보고, 사람 많을 때를 대비해 준비해 둔 걸까 궁금한, 무수히 쌓아 올린 의자 더미도 쳐다봤어. 보통 앞만 보고 가긴 하는데, 희한하게 특이점이라고 할까, 일상에서도 홀로 툭 튀어나온 부분은 잘 보여. 예를 들면 지금 말한 의자 더미처럼 말이야. 레스토랑 바로 옆 그늘진 곳에 아름답게 심긴 꽃들도 그렇고. 그리고 그런 면면들은 새삼 세상은 아름답고, 아주 작고 세심한 부분들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구나 느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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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오늘 너도 한 번 그런 아름다움을 찾아보면 어때? 새해라고 해도 카운트다운 끝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잖아. 아주 잠깐 설레고 기뻤을 감정도, 또 무참히 다가온 일상의 무게에 신기루처럼 파스스 흩어졌을 수도 있고. 근데 보통의 삶은 대부분 그러잖아. 1월은 1월이고, 8일은 8일로, 하루는 하루인, 무심할려면 손쉽게 무심하고 무감하게 넘어갈 수 있는, 넘어가는 시간들.
그런 무게가 쌓이면 어느 날 사람이 텅 비는 것 같아. 너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랬어. 하루가 다 똑같아 보이고, 가는 날이 오는 날 같고, 굳이 이 하루를 헤아리며 살아갈 이유가 있나 싶을 때가. 그럴 땐 재빨리 하늘을 보거나 산책을 가는 거야.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목격하기 위해. 여전히 별나고 특이하고 낯선 장면들을 바라보며 모든 게 똑같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기 위해서 말이지.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잠깐이라도 주변을 둘러봐. 날이 오후에라도 풀린다면 잠깐 바람 쐬러 나가볼 수도 있겠지. 커피 산다는 명목하에 슬쩍 중간에 빠져나가도 좋겠고. 그러면서 봐. 너도 나처럼 무딘 세계 속에서도 불쑥 튀어나온 별난 존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흐린 와중에도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무언가, 놀이터 모래밭에 숨겨진 은빛 금빛 총알처럼 무가치하면서도 아름다운 무언가를 반드시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 아름다움이, 새해 시작 후 변함없이 비슷한 일주일에 질린 널 환기할 수 있을 거라 믿어. 그러길 또 바랄게.
브라이언트 파크 하나 달랑 쓴 오늘이지만 다음 주에는 다른 공원들도 조금 더 소개해 줄게. 여기도 좋았지만 사실 유니온 스퀘어를 제일 좋아했거든(TMI지만 주말에 여는 마켓 때문에 더 좋아하긴 함). 무용한 아름다움을 잔뜩 발견하는 월요일이길 바라며, 다음 주에 건강하게 보자. 샬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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