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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이란 책을 최근에 읽었어. 한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역순으로 차근차근 말해주는 소설이야. 너는 이 짤막한 설명만 듣고 단순한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이 책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 이 일이 벌어졌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그리고 그게 내가 이 편지의 서문을 연 까닭이야. 다정함이 서로를 구해낼 수 있다면.
이런 대목이 있어; “방금 등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듯도 했지만, 나는 다가오는 열차에서 시선을 돌려 뒤를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피곤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이건 평소의 나야. 굉장히 찔리는 문단이었어. 요즈음 나는 의식적으로 사회/정치 이슈를 안 보고 있거든. 힘드니까. 힘들기도 하고, 그 망망대해 같은 이슈들 보면서 되도 않는 자책과 절망에 자꾸 휩싸일 바엔 내 주변이나 잘 챙기는 게 맞지 않나 해서. 하나님이 이웃 사랑하라고 했잖아. 그럼 지금 내 이웃은 저기 저 멀리 화면 속 활자와 사진에 나온 사람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들, 내 동네를 말하는 게 아닐까 해서…정말 전원 버튼 누르듯 안 봤거든. 어쩌다 소식들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와도 멍청이처럼 아, 그랬구나, 해버렸어. 지금 생각하면 그건 내 나름 방어수단이었을 수도 있겠다. 물렁물렁한 벽을 세운 거지. 물컹하지만 확실한 선을.
근데 해설에서 이러더라고; “완전히 우발적인 것들의 결합체로 보이는 사건 이면에서도 사회적인 것이 ‘필연코 작동한다’”고. 맞아. 사실 나는, 나 혼자만 두고 보자면 평생 살 내 집이 없어도 돼. 어떻게든 살아질 걸 알거든. 하나님이 날 버려두지 않는다는 걸 알아서, 확신(했다가 불안해했다가 아주 오락가락이지만)하니까, 매일의 만나가 주어질 걸 아니까 바람처럼 물처럼 살아도 되거든? 근데 가족이랑 엮이면 그 생각도 결심도 순식간에 흔들려. 무너지고. 나는 날아오르고 싶은데 손을 잡고 있던 걸 까먹고 있던 거야. 늙음도 아픔도 돌연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어서 아차, 하게 되는 거지. 돈이 없으면…생존 수단을 강구하지 않으면 저렇게 되거나 저렇게 될 확률이 높아지겠구나. 우리 집이 그렇게 벌벌 떨 정도로 가난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집이 없으면 안 돼, 집이 있으니까 그나마 불안해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거야, 넌 꼭 집을 사, 집 당연히 사야지…같은 말을 계속 듣고 있으면 그게 나의 유일신이고 목표가 돼. 집, 이라고 말했지만 적확히 말하면 돈이지. 혼자 살거든 나는? 그래서 숨쉬는 데도 돈이 필요하단 말이 뭔지 알아. 게으르고 여유롭게 살고 싶어도 안 된다는 걸 고지서 날아오는 걸 보면 뼈저리게 느끼지. 그럼 자꾸 나를 채찍질하고 밀어붙이고,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도 있으니까 뭔가 끊임없이 만들고 자기PR을 하고…계속, 지쳐도 지친 티 안 내고 죽어라 굴러야 한다는 걸 아니까,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그래야 돈 벌고 숨 쉬고 살 수 있으니까. 피곤할 수밖에 없어. 체력과 별개의 문제야, 이건.
나는 요새 낮에도 잘 돌아다니는데, 거리를 걸어다니다보면 기분이 이상할 때가 있어. 모르겠다. 그냥 내가 남의 생애를 멋대로 판단하는 확률도 분명 있겠지만, 어쩌면 내가 피곤하다고 외면하고 지나치는 동안 어떤 사람은 죽었고, 죽어가고, 죽음을 결심했을 수도 있겠지…7초에 한 명씩 자살한다고 하잖아. 그런 게 문득 떠올라서. 왜 저래, 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그 찰나에 누군가는 누군가의 손내밈 따위 하나 못 받아서, 말 한 마디 못 받아서 고꾸라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기분이 이상해지더라.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은, 사실 별 거 없어. 왜냐면 너한테 그러니까 좀 더 서로를 신경쓰자, 사랑하자! 하기엔 나도 그러지 못하는 때가 너무나 많았고 지금도 그러고 있으니까. 한결 여유로운 때니까 그렇게 사람을 살피고 관찰하며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여유롭지 않았던 시절 나는 모든 게 꼴도 보기 싫어서 도망친 적도 있었으니까. 그냥, 조금만 스스로를 잘 돌봐주고…살펴주잔 얘기를 하고 싶었어. 알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란 말씀의 전제는 내 몸이라는 거. 나는 이걸 몰랐거든. 무조건 이웃을 먼저 보라는 건 줄 알았고, 나를 채찍질하는 건 아주 쉬워서, 왜 매일 도망치고 싶어하고 사라지고 싶어했는지 몰랐거든. 정말로.
그니까, 디야. 다니엘. 우리, 서로를 잘 다독여주고, 그 후에 서로를 다정하게 바라보고 인사하자. 환대가 뭐 거창한 거니? 서로 안녕, 잘 지냈어? 물어봐주고 가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 그니까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들여다본다면 그게 환대지.
자, 이 다정함이…건조할 수도 있을 말들이, 너에게 조금이나마 따스한 다정으로 다가가서, 지금 슬프고 막막한 너를 구해낼 수 있길 바라며.
또 보자. 안녕, 안녕.
2023.06.01 D